계승범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가 최근 펴낸 책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푸른역사)에서 ‘해외파병’이라는 주제로 조선의 역사를 분석했다.
조선 초기 조정은 명이 파병을 요청할 때 국가의 실익을 먼저 저울질했다. 세종대에 몽골 원정을 이유로 명이 청병(請兵)했을 때는 만장일치로 거절했고, 세조대에 건주여진(建州女眞·남만주 지역 여진) 원정의 파병 요청은 논의한 뒤 받아들였다. 사대(事大)가 국익과 마찰을 빚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중종대엔 명이 파병 요청을 할지 모른다는 말이 들리자 청병칙서가 오기도 전에 파병을 기정사실화했다. 사대와 국익을 동일시하는 인식이 자리 잡은 것이었다. 여기에는 반정 후 천자와의 관계를 통해 왕권을 확립하려 한 중종의 태도와 소중화(小中華) 의식 확산 등이 작용했다고 계 교수는 분석했다.
광해군대 후금 원정을 위한 네 차례의 파병 요청 때는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광해군은 원정 성공의 가능성이 낮은 것 등 현실적인 이유로 반대했지만 결국 네 번째 요청이 오자 파병했다. 이후 호란을 겪은 뒤 조선이 후금(청)의 칙서를 받아 명을 공격하게 된 상황은 조선 조정에 이념적 공황을 불러오는 충격이었다.
명-청 교체기 지배 엘리트들의 태도는 고려나 조선 전기의 현실적인 대응과 달리 국제 질서에 융통성 있게 대처하지 못한 이례적인 사례라고 계 교수는 분석했다. 그는 “당시 동아시아엔 청 중심의 질서가 자리 잡고 있었지만 지배 엘리트는 ‘존명의리’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이를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