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서울연극제의 발견 ‘한스와 그레텔’

  • 입력 2009년 5월 14일 02시 57분


신념과 사랑… 어느 것을 택할것인가

올해 30회를 맞은 서울연극제는 지난 30년간 거쳐 간 수백 편의 연극 중에서 시대적 대표성을 띤 9편의 연극을 엄선해 공연 중이다. 기자의 관심은 그중에서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의식과 생명력을 보여주는 작품을 찾는 것이었다.

전체 작품의 3분의 2가 공연된 가운데 이 기준에 부합할 만한 작품은 ‘봄날’(이강백 작, 이성열 연출)과 ‘한스와 그레텔’(최인훈 작, 채승훈 연출) 등 두 편으로 압축된다. 흥미롭게도 두 작품은 출품작 9편 중 가장 오래된 1984년 작이다.

당시 ‘봄날’이 대상과 연출상 등 3관왕에 올랐으나 ‘한스와 그레텔’은 무관에 그쳤고 이후 재공연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25년 만에 무대에 오른 이 작품은 아직도 이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한국 사회의 오금을 저리게 만들 지적 스릴과 역사와 상상, 현실과 동화, 신념과 사랑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밀도 높은 구성으로 관객의 숨통을 조인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 연극제 최고의 수확이라 할 만하다.

30년간 단 1명의 죄수를 수감한 비밀감옥. 유일한 간수 X(이호성)는 관객들을 3중 철문 뒤의 죄수에게로 안내한다. 그리고 온화한 표정으로 렌즈를 닦고 있는 한스(남명렬)라는 죄수와 설전을 벌인다. 영화 ‘양들의 침묵’을 떠올릴 만한 구도지만 그들의 대화는 지독히 관념적이어서 핏빛이 아니라 회색빛으로만 비친다. 그러나 극이 진행되면서 한스가 간직한 비밀은 한니발 렉터의 그것보다 더 끔찍한 것임이 드러난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말 패전 위기에 몰린 히틀러의 지령을 받고 유대인 수용소에 수감된 600만 명의 생명과 나치정권의 보존을 교환하자는 강화협상안을 들고 영국을 찾아왔던 특사였다. 연합국사령부는 그 제안을 묵살했다가 히틀러가 유대인의 학살을 감행하자 그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그를 비밀감옥에 수감한 것이다.

한스는 진실의 증언자라는 사명감으로 30년을 버텨왔다. 게다가 그는 히틀러가 타락하기 이전 나치즘의 순수성을 믿는 사상범이다. X는 그에게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킨다면 석방시켜 주겠다는 상부의 지시를 전한다. 하지만 한스는 한국의 비전향 장기수들처럼 “진실에 대한 봉사에는 은퇴가 있을 수 없다”며 거부한다. X는 “진실에는 은퇴가 없어도 진실에 대한 봉사에는 은퇴가 있을 수 있다”며 “1년에 단 한 차례 면회만 허락됐지만 30년간 당신을 기다려온 아내 그레텔을 생각해라”라고 설득한다.

X는 또 말한다. 신념을 위해 단 하나의 자기만을 지키며 살기보다 시간의 흐름 속에 유동하는 여러 명의 자기를 포용할 때 진정 남도 이해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그리고 홀로 남은 한스의 처절한 고뇌가 이어진다.

자,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한스는 1941년 영국으로 건너와 강화협상을 벌이려다 억류된 나치정권의 부총통 루돌프 헤스가 모델이다. 종전 후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는 1987년 베를린 특설 감옥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기밀로 묶여 있다. 그가 유대인의 생명과 독일의 영토 보존을 교환하려 했다는 것은 작가가 설정한 극적 가설이다. 숲 속에 버려진 오누이가 마녀를 물리치고 집으로 돌아온다는 동화 ‘헨젤과 그레텔’을 패러디한 제목은 이 작품의 결론을 암시한다.

영화 ‘양들의 침묵’과 ‘소피의 선택’을 합쳐놓은 듯한 이 작품은 ‘신념의 감옥’에서 석방될 때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창백한 지식인의 고뇌를 엄청난 독백으로 소화하면서도 절제된 완급 조절을 펼친 남명렬 씨의 연기가 돋보인다. 15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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