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86>

  • 입력 2009년 5월 5일 13시 45분


18장 나이트메어와 춤을

86회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낯선 곳에 이를 때면 묻게 된다. 처음일까? 나를 이곳으로 데려오기 전에, 함께 이곳에 닿은 이는 없을까? 그리고 또 묻게 된다. 언제부터 나를 이곳으로 데려오고 싶어 했을까? 그리고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는 무엇일까? 이렇게 많은 질문이 떠오르는 이유는……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아서이다.

운전은 즐거웠다.

컨디션이 유난히 좋은 탓인지 조금만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도 속도가 급상승했다. 제한속도인 시속 120킬로를 넘기지 않으려고 자주 속도를 확인했다. 180킬로를 넘어서자 숫자를 세는 안내 목소리가 빨라졌다.

"181, 182, 183, 184……."

190에 이르자, 1차 경고가 왔다.

"속도를 줄이세요. 200킬로 이상이면……."

석범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복화술처럼 그 다음 문구를 빠르게 따라했다.

"자동차는 자동운전으로 전환되고, 운전자는 체포됩니다."

그리고 혼자 웃었다. 생각해보니 운전 중에 혼자 웃은 적도 오랜만이다, 바보처럼.

네 개의 새로운 대문을 잇는 정사각형 중심가를 벗어나자 자동차가 눈에 띄게 줄었다. 특별시 정부는 정사각형 밖에도 주거지역과 놀이공간을 만들었지만, 특별시민은 계속 중심으로만 모여들었다. 외곽에 살 때는 특별시민이 되는 것이 목표였는데, 일단 특별시민증을 받은 후로는 정사각형 안에 머무르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한 시간을 달리고 차를 세웠다.

특별시 경계를 벗어났기 때문에 밤에는 함부로 차창을 열거나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바이러스 예방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몬스터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돌연변이 인간인 뮤텍스(Mutant X)들이 특별시 경계 밖에 숨어 살았던 것이다. 특별시 정부는 특별시 경계 안에는 뮤텍스가 단 한 명도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경계 밖까지 뮤텍스를 색출 조사하고 주거를 제한하는 일은 사실상 포기한 상태였다. 뮤텍스들도 대낮에는 위성 통신망에 포착될 것을 두려워하여 숨지만 어둠이 깔리면 종종 출몰했다. 특별시 경계를 벗어나는 자동차마다 뮤텍스들을 쫓기 위해 고압 전류가 흘렀다. 차문을 열고 어둠을 향해 걷는 것은 뮤텍스들에게 목숨을 내놓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차가 멈춰도 민선은 깨지 않았다. 석범은 잠든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까칠하고 엉뚱한 여자. 한 치의 오차도 만들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또 타인에게도 자신의 기준을 강요하는 여자. 이런 여자와 결혼하면 하루하루가 편치 않으리라. 그렇지만 늘 자기 것에만 집착하는 것 같지는 않다. 타인의 악몽을 치료하기 위해 꼬박 밤을 새우지 않았는가. 겉은 찬바람이 쌩쌩 불지만 속은 따듯한 여자일지도?

그녀의 왼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1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서둘러 출발했다. 문득 민선이, 언제부터, 이런 드라이브를 계획했을까 궁금해졌다. 즉흥을 싫어하는 여자니까.

30분을 더 달리니 바다가 나왔다. 밤바다를 왼편으로 끼고 올라가니 멀리 달섬의 불빛이 반짝였다.

특별시 근교에는 보안청에서 안전을 책임지는 휴양지가 열두 군데 있었다. 바이러스 예방은 물론 뮤텍스의 접근도 차단된, 평화롭고 평화롭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달섬은 그 중에서도 바다에 둘러싸인 유일한 휴양지였다. 석범은 달섬의 노을이 은은하고 새벽바람이 맑다는 풍문만 들었을 뿐 나들이는 처음이었다.

"일어나 봐요. 다 왔어요!"

해안에 차를 세우고 민선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그녀는 폭발음이라도 들은 듯 눈을 크게 뜨고 허리를 확 일으켰다.

"여, 여긴……."

"달섬 바로 앞입니다."

"지금 몇 시죠?"

4시 28분이었다. 시간을 확인한 민선이 급히 달섬을 향해 손을 들어 흔들었다.

"가까이 붙여요."

"예?"

"어서 가까이 붙이라고요. 1분 17초밖에 안 남았어요."

두 사람을 태운 차는 도로를 벗어나서 파도 찰랑이는 해변으로 내려갔다. 차체가 심하게 흔들려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였다.

"아이고 머리야! 어, 저, 저게 어찌 된……."

해변에서 달섬까지 들어찼던 바닷물이 급속하게 빠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숨었던 2차선 도로가 나타났다.

"서둘러 건너요. 1분 후면 다시 물이 차오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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