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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2월 18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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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꼭 필요하고 편안한 존재되길 소망한것
방송출연길 차속에서 노래 연습하시던 모습 생생
할아버지, 아버지처럼 모셨던 분인데 실감 안난다”
“추기경님께서는 과묵한 편이셨고 평소 차 안에서 묵상을 하거나 강론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끔 방송 출연을 위해 노래 연습도 하셨습니다. 내일이면 또 평소처럼 제 차에 타실 것 같은데….”
30년 동안 고 김수환 추기경의 차를 운전했던 김형태 씨(70·사진).
김 추기경이 평소 “가장 가까운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30년 동안 내 발이 되어 준 운전사 김형태 형제”라고 답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1971년 가톨릭출판사에 입사한 김 씨는 1978년 3월 25일부터 선종 직전까지 김 추기경의 차를 운전했다.
김 추기경의 ‘가장 가까운 형제’인 김 씨를 17일 오전 서울 명동성당에서 만났다.
그는 “김 추기경께서 ‘밥이 되자’는 말을 자주 하셨다”고 기억했다.
“추기경님께서는 차에 타셔서도 자주 혼잣말처럼 ‘밥이 되어야 하는데…’라고 말씀하셨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세상 누구에게나 꼭 필요하고, 격식을 차리지 않고 편하게 먹을 수 있는 밥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 하셨던 것이죠.”
눈가를 훔치며 김 씨는 김 추기경의 노래에 얽힌 일화를 꺼냈다. 그는 “추기경님께서 가장 좋아하고, 자주 부르셨던 노래는 ‘애모’였다”며 “방송에서 부르기 위해 차 안에서 박자, 가사도 맞지 않는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면서 열심히 준비하셨다”면서 웃었다.
김 씨는 30년 동안 그림자처럼 추기경과 함께 다녔지만 화를 내거나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평정이 흔들리는 모습은 30년 동안 본 적이 없다”고 전했다.
김 추기경은 바쁜 일정에서도 김 씨의 영명축일(세례명의 성인 축일)을 축하하는 일은 한번도 거르지 않았다.
“제 세례명이 ‘요한’인데 영명축일인 6월 24일 아침마다 ‘요한이 생일이구나’라고 챙겨주셨습니다. 스테파노(추기경의 세례명)의 영명축일은 성탄절 다음 날인데 제대로 챙겨드린 적이 없었어요. 너무 후회가 됩니다.”
김 씨는 “기도와 묵상, 그리고 독서가 취미였던 추기경이지만 젊은 시절엔 매주 북한산에 오르기도 했다”며 “산행은 빼먹지 않고 하셨는데 1998년 혜화동 주교관으로 거처를 옮기신 뒤에는 너무 바빠서 그마저도 뜸해졌다”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김 씨의 세 딸 결혼식에서 모두 주례를 섰다. 결혼식 전 신랑과 신부를 직접 불러 이야기를 나누며 ‘추기경 김수환’이라는 친필 서명을 담은 성경책도 함께 건넸다.
김 씨는 “매년 설날에 딸, 사위와 손자 손녀를 데리고 세배를 가면 아이들에게 ‘건강히 커라’며 덕담을 하셨다”며 “지난해에는 추기경께서 편찮으셔서 ‘내년엔 꼭 찾아뵙겠습니다’고 했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한참을 침묵하던 김 씨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마지막으로 입원하실 때만 해도 ‘배가 아프다’고 하시며 들어가셨어요. 일주일 정도면 퇴원하실 줄 알았는데. 할아버지, 아버지처럼 모셨던 분입니다. 선종이 정말 실감이 나질 않아요.”
그러곤 더는 말하기 힘든 듯 손을 저으며 자리를 떴다.
“이런 심정 아실지 모르겠지만. 다음에 하시죠. 지금은, 지금은 더는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김 추기경의 ‘형제’ 김 씨는 김 추기경의 시신이 안치된 명동성당 대성전 안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