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

  • 입력 2009년 1월 5일 02시 56분


일러스트=김한민
일러스트=김한민
“사건번호 35! 30세, 93퍼센트 인간, 여, 유전형질연구원, 직접사인 뱀독에 의한 급성중독, 간접사인 오른 팔꿈치 절단에 의한 과다출혈. 지금부터 서울특별시 종로 8가 홀로그램 거리 <앙상블>에서 살해된 박진숙의 브레인 스캔을 시작하겠습니다. 브레인에서 인출할 피해자의 단기기억은 120초입니다.”

2049년 1월 5일, 서울특별시 보안청 대뇌수사팀 은석범 검사는 스티머스(STEMERS·Short-term Memory Retrieval System)의 시작 버튼을 눌렀다. 스티머스는 시체로부터 떼어낸 회백질의 뇌에서 단기기억을 영상으로 재생하는 장치다.

잡음과 함께 검은 화면이 잠시 일렁거렸다. 석범은 어젯밤 보다가 잠든 고전 드라마 CSI를 어금니에 올리고 씹어댔다.

2009년 세계 최고의 과학수사 드라마? 스티머스 하나면 반나절에 마칠 수사를 비비 꼬며 질질 끄누나. 이야기가 끝없이 둘로 갈라지니 내 먼저 잠들 수밖에! 40년 전 인간들이란 참…….

또각또각 어둠을 뚫던 구두소리가 멈춘다.

밝아온 화면에는 흰 발자국이 무수하다. 눈 쌓인 길바닥이 흔들흔들 이어지다가, 하트 모양 안내판의 빨간 테두리를 훑고 중심을 향한다.

‘어서 오십시오. 홀로그램 명품 거리 <앙상블>입니다. 1년 구매 실적이 특별시민의 2퍼센트에 드는 손님만 입장 가능하십니다.’

‘2’가 피에로의 코처럼 부풀다가 터지고 또 부푼다.

안내판을 지나서 거리로 접어든다.

깜짝 파티처럼, 꽃비가 내리고 모차르트 현악 4중주가 깔린다. 좌우 벽을 따라 순식간에 화려한 가게들이 늘어선다. 이 세상 단 한 사람만을 위한 명품으로 가득한 거리다. 잘 생긴 홀로그램 남자모델들이 껑충껑충 음표를 밟으며 다가온다.

“진숙 님! 열흘 만이네요. 반갑습니다. 동행한 손님이 찾으셨던 아마존 천연 악어 가방, 준비해 뒀습니다.”

“됐어요!”

악어 가방을 밀친다.

“진숙 님! 구두를 바꾸실 때가 훨씬 지났…….”

“됐거든요.”

쌀쌀맞게 대꾸해도 그들은 미소를 잃지 않는다.

“이 스카픈 마음에 드실 겁니다.”

검은 가면으로 눈을 가린 모델이 사방연속 코브라무늬 스카프를 손님 어깨에 걸친다.

“다음에! 지금 바빠.”

손사래 친다. 어깨랑 어깨가 스친다. 모델이 뒷걸음질로 따라와선 막는다. 가면 속 푸른 눈동자에 손님의 얼굴이 담겨 있다.

“아름다움으로 타인의 심장박동을 12초 만에 평균 32퍼센트 이상 촉진시키는, 특별시연합 공식 인정 미인을 위한 제품입니다.”

멈춰 선다.

손등을 세운 팔이 천천히 모델의 얼굴로 향한다. 손끝이 입술에 닿는다.

“아! 따, 듯, 해.”

모델 품에 안긴다. 가슴을 이마로 톡톡 치며 속삭인다.

“깜짝 놀랐잖아. 겨우 20분 늦었는데, 그 사이를 못 참고 마중 나온 거야? 웨딩드레스나 고르며 기다리겠다더니…….”

포옹을 푼다. 모델의 도톰한 입술이 다가온다.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스카프가 깜빡깜빡 흐릿하다. 코브라무늬 아래 둥근 띠를 닮은 무엇인가가 목덜미로 파고든다.

화면이 심하게 요동치고 시야가 차츰 낮아진다. 무릎이 꺾이고 머리가 바닥에 부딪힌다. 뱀 한 마리가 무릎 아래에서 기어 나온다. 모델이 그 뱀을 집어 들고 가면을 벗는다. 가슴, 어깨, 목, 얇은 입술, 콧잔등, 눈동자가 따로따로 잘려 뒤섞인다.

“편히 쉬어. 사랑해.”

손바닥이 화면을 서서히 덮는다. 잔손금들이 뿌옇게 확대되고…… 돌연 어둠이다.

점점점 점점 점, 구두 소리 멀어진다.

스티머스를 통해 영상으로 되살린 박진숙의 최후는 여기까지였다. 석범은 화면을 돌려 살인범의 조각난 눈 코 입 귀를 퍼즐처럼 맞췄다. 매부리코에 눈이 깊고 차가운 백인이다.

“이름은 클락, 전과 8범, 살인 및 사체유기 혐의로 특별시 연합 수배자 명단에 등록된 지 3년이 지났습니다. 변장술에 능하고 아마존 강가에서 성장하여 파충류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납니다. 열흘 전 박진숙은 <앙상블>에서 예비신랑의 이름을 새긴 예물 시계를 샀습니다. 스미스, 바로 이 자가 클락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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