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91년 지하드, 英인질 석방

1991년 11월 18일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의 특사 테리 웨이트가 1764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웨이트는 1987년 1월 레바논 베이루트에 도착했다. 인질의 석방 협상에 나선 길이었다. 그는 화려한 경력을 지닌 협상가였다. 이란에 억류된 선교사들의 석방을 이뤄냈고 리비아에서 영국인 인질을 구해냈으며 레바논에서 미국인 인질이 풀려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엔 웨이트 자신이 시아파 무슬림 단체에 붙잡히고 말았다.

웨이트의 회상. “인질이 된 뒤 세 가지를 다짐했다. 첫째, 후회하지 말자.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낼 순 없다. 둘째, 자기 연민에 허우적대지 말자. 나보다 더 나쁜 상황에 처한 사람도 많다. 셋째, 감상에 심하게 빠지지 말자. 삶이란 다시 살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는 독방에 감금됐다. 눈가리개를 하고 사슬로 라디에이터에 묶인 채 더디고 어두운 시간을 견뎌야 했다. 자주 두들겨 맞았고 참수해버리겠다는 협박에 시달렸다. 천식으로 고생도 많았다. 이동할 때는 거대한 냉동차에 실리곤 했다.

간혹 옆방 인질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었다. A는 한 번, B는 두 번, C는 세 번, 이런 식으로 벽을 두드리는 노동집약적인 대화법이었다. “그때 내 이름이 테리 웨이트인 것이 애통했다. T, R, W 같은 알파벳을 표현하려면 한없이 벽을 두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석방되기 6개월 전부터는 납치범들이 예전보다 부드럽게 대했고 소형 라디오를 통해 국제방송인 ‘BBC 월드 서비스’도 접할 수 있었다. 외부세계와의 접속은 희망, 안정과 함께 깊은 우울도 가져왔다. 아내와 아이들은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어느 날인가 납치범이 독방에 들어와 “당신, 풀려날 거요”라고 웨이트에게 한마디 던지고 나갔다. 그리곤 옷가지 몇 점을 줬는데 너무나 작은 것들이어서 그는 아주 우스운 꼴이 됐다. 그들은 웨이트의 눈을 가리고 차에 태워 시리아 정보부에 내려놨다. 유엔과 납치단체의 지난한 협상이 결실을 본 것이다.

영국 리넘 공군기지에 도착했을 때 웨이트는 생각했다. ‘드디어 끝이다. 이제 끝났다.’ 납치 당시 10대였던 아들은 그 사이 훌쩍 자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2007년 무장 지하드 단체에 납치됐다가 114일 만에 풀려난 BBC 가자지구 특파원 앨런 존스턴은 “가자의 테리 와이트가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장 큰 공포였다”고 토로한 바 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