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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10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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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미
남자들 바보 같잖아요
예쁜 여자만 좋아하고
● 박찬욱
여자 내숭 대충 알지만
알면서 속아주는 거죠”
“이 감독님, 남자 싫어하세요?”
“아뇨! 남자 너무 좋아… 아니, 그냥 남들 다 그러는 만큼 좋아해요. 하지만 연애가 늘 마음대로 안 되죠.”
13일 오전 서울 종로의 한 카페. ‘미쓰 홍당무’(16일 개봉)의 이경미(35) 감독은 이 질문에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곁에 앉은 이 영화의 제작자 박찬욱(45) 감독이 한마디 거들었다. “싫어하기는커녕 밝히는 쪽이에요.”
공효진 주연의 ‘미쓰 홍당무’는 한 남자를 가운데 놓고 네 여자가 벌이는 소동을 그린 영화다. 그런데 박 감독 말처럼 그 가운데는 ‘텅 비어 있다’. 문제의 그 남자 서 선생(이종혁)은 주견 없는 연체동물 같다. 그뿐 아니라 등장하는 모든 남자가 바보스럽고 무기력하다.
“여자들의 다툼에 이야기의 에너지가 있는 영화예요. 여자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남자 캐릭터를 흐리멍덩하게 과장한 거, 맞아요. 그런데 사실 남자들, 바보 같잖아요. 내숭덩어리 예쁜 여자만 좋아하고….”(이 감독)
저예산(10억 원)을 들인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안면홍조증 환자 양미숙(공효진). 자기혐오를 일상에서의 신경질로 푸는 중학교 영어 교사다. 그가 짝사랑하는 서 선생은 얼굴 예쁜 내숭덩어리 러시아어 교사 이유리(황우슬혜)에게 관심을 보인다. ‘예쁜 것들’과 어리석은 남성에게 분노하는 양미숙은 이 감독의 시선을 대변한다. 박 감독이 남성 관객을 변호했다.
“남자들… 여자 내숭 떠는 거 대충 다 알아요. 알면서 속아주는 거죠. 이유리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남성 관객을 위해 등장하는 캐릭터예요. 현실 세계에 쌓이고 쌓인 내숭덩어리들의 대표죠. 여자들은 짜증내면서 보겠지만 남자들은 쉽게 이해할걸요.”(박 감독)
기자도 남자다. 깜찍한 외모의 이유리가 엽기적인 포즈로 서 선생을 유혹하는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웠다. 하지만 시사회에서 여자 관객들은 이유리가 등장할 때마다 “저 여자 정말 싫다”고 수군거렸다.
“알면서 속아준다고요? 어떡하나. 하긴 이유리가 들어가서 영화 전체 이야기에 균형이 잡힌 것 같긴 해요. 시나리오 처음 나왔을 때는 양미숙 캐릭터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박 감독님 집에서 보름 합숙하면서 살을 붙였죠.”(이 감독)
‘미쓰 홍당무’가 장편 데뷔작인 이 감독은 한국의 2004년 미장센단편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박 감독이 ‘친절한 금자씨’(2005년) 연출부로 이 감독을 기용해 인연을 맺었다. 박 감독은 차기작 ‘박쥐’ 준비에 바쁜 중에도 ‘미쓰 홍당무’ 촬영 현장을 일일이 챙겼다.
“양미숙과 이유리는 한국 영화에 거의 등장하지 않은 캐릭터입니다. 이런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능력은 아무나 가진 게 아니죠. 다른 감독 영화 제작하는 건 처음인데…. 시나리오의 각별함을 내세워 투자자를 설득했습니다.”(박 감독)
영화에서 ‘만년 왕따’ 양미숙은 또 다른 왕따인 서 선생의 딸 종희(서우)와 친구가 되면서 삶의 위안을 찾는다. 따뜻한 결말이지만 안이하다는 비판도 있다. 집단따돌림 문제를 코미디 소재로 가볍게만 그린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18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은 게 안타까워요. 교사들 사이의 불륜이라는 설정이 문제로 지적됐지만…. 왕따 문제로 상처받았던 사람, 상처를 줬던 사람, 방관했던 사람. 모두 한번쯤 자신을 돌아볼 계기가 되면 좋겠어요.”(이 감독)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주목! 이 장면▼
사진 찍을 때 ‘왕따’… “마음에 너무 큰 상처가…”
고등학교 소풍 날. 급우들은 못생기고 가난한 양미숙을 사진 찍는 줄에서 밀쳐낸다. 좋아하는 선생님과 사진을 찍고 싶었던 미숙은 맨 뒤에서 펄쩍 뛰어올라 얼굴을 남긴다. 미숙을 연기한 공효진은 이 장면에 대해 “누구나 마음에 너무 큰 상처가 생겨서 인생이 바뀌는 날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