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의 지평선]커다란 富의 건너편, 기아의 지옥이 보이는가

  • 입력 2008년 3월 11일 02시 54분


어떤 기쁨도 공짜배기는 없다. 기쁨에는 반드시 그 대가가 따른다.

그래서 걸림 없는 기쁨은 끝내 걸림 있는 것이 되고 만다.

기쁨은 슬픔의 앞이다. 아니 기쁨은 기쁨 혼자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슬픔의 궁극적 동의어인지 모른다.

고(苦)와 락(樂)을 합쳐 고락이라고 말할 때 어느덧 고는 락이고 락은 고이다.

10년 기쁨은 혹시 20년 슬픔의 빚일지 모른다.

그러나 기쁠 때는 그냥 기뻐하라. 텅 비어라.

지난 시절 서울시 청사 옥상은 서울시민의 영역이 아니라 비둘기의 영역이었다. 비둘기가 낮에는 거기 있다가 저녁 모이를 먹고 나면 일제히 서대문교도소로 건너간다. 거기 가서 잠을 잔다.

거기서 미결수들이 주는 콩밥 찌꺼기나 건빵 부스러기를 염치 불구하고 얻어먹기도 한다.

아침에는 다시 시청 옥상으로 건너온다.

이 출근과 퇴근을 되풀이하는 비둘기는 텃새회색머리비둘기다.

19세기 초 수십억 마리 나그네비둘기는 100년 뒤의 20세기 초에 멸종되었다. 생멸은 근대에도 엄연하다. 그 멸종의 원인은 지금과 같은 환경오염이 아니라 놀랍게도 인간의 남획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직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텃새회색머리비둘기의 ‘구구구’ 목쉰 울음소리는 얼마나 고마운가.

25년간의 안성 생활에서 나는 멧비둘기 울음소리와 친숙해졌다. 봄밤 소쩍새 소리, 여름 뻐꾸기 소리 꾀꼬리 소리 그리고 한밤중의 딱따구리 소리들에 견주면 비둘기 소리는 투박하다. 하지만 이 소리가 나에게는 어느 새소리보다 향수를 일으킨다.

비둘기는 나그네비둘기의 멸종에도 불구하고 아직 300종이 있다. 한반도만 해도 다섯 종류나 된다 한다.

어린 시절 일본 육군이 비둘기 발목에 쪽지를 매어 날리는 전서구(傳書鳩)를 활용하는 것을 알았다.

이런 통신은 멀리 기원전 400년경부터였으니 고금이 다를 바 없다.

아마도 비둘기를 평화의 새로 삼은 것은 노아의 방주에서 올리브 잎사귀를 물고 돌아온 것에 연유하는지 모른다. 서울시청이 굳이 비둘기를 없애지 않았던 것도 평화의 표상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비둘기의 생태는 평화와 반대이다. 다른 새들의 영역을 무시로 넘보는 새이다. 그렇다면 침략의 새라고 해도 될 법하다.

한 통계에 따르면 지구 역사상 가장 거대한 집단의 생명체 1등은 메뚜기이다. 펄 벅의 소설 ‘대지’는 중국 메뚜기의 위력을 묘사하고 있다. 이 메뚜기에 이은 2등이 바로 20세기 초 멸종된 나그네비둘기였다.

그런데 3등은 동물이나 식물이 아닌 인간이다. 바로 중국인이다. 인간이 동물과 동등한 서열로 매겨지는 것이 중국인으로서는 불쾌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중국인은 한족(漢族) 산아제한으로 인구를 통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계 밖으로 팽창하고 있다.

21세기 초의 중국 인구 13억은 66억 인구 지구의 운명을 좌우하는 그런 인구이다. 이런 중국과 인도를 채우고 있는 대인구의 공간에 에마뉘엘 토드의 인구학이 포괄하는 중동의 인구폭발까지 아우르는 아시아야말로 그 어떤 힘도 맞설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세기의 후반에 이르러 히말라야 이남과 이북의 대륙이 세계에 대해서 어떤 축복을 낳을 것인가, 어떤 종말론적 재앙을 퍼뜨릴 것인가에 대한 문명의 미래학이 있어야 한다.

이제까지의 서구우월주의 서구중심사관은 이제 하나의 추억이 될지 모른다. 이를 성급하게 좋아할 수도 없다.

세계인구 30억 명이 하루에 단돈 2달러로 산다. 10억 명이 1달러로 산다. 세계 인구 10%는 하루 2달러로 살고 있다는 통계도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이 젖먹이 때로 그 생을 끝내버리는 일이 허다하다. 굶는다는 것과 굶어죽는다는 것만큼 처참한 일이 어디 있는가.

기아의 비극은 차라리 전쟁의 비극보다 더 큰 비극이다.

그런데 이 문명의 첨단 시대를 활짝 열어놓는 21세기가 인류의 식량이 보장되는 세기가 아니라는 무서운 현실 위에 우리는 살고 있다.

심지어는 지난 20세기보다 더 심각한 식량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증언 앞에서 오랜 농지가 개발의 광기로 파헤쳐지는 광경이 뻔뻔스럽게 불어나고 있다.

커다란 부(富) 저 건너에서 커다란 기아가 널리는 것이 바로 지옥이다.

인류! 아귀의 운명을 언제나 벗어날 수 있는가.

오늘 아침의 식탁.

한 잔의 우유 혹은 한 그릇의 장국 앞에서 잠시 눈을 감는다.

객관은 어떻게 가능한가.

스콜라철학의 ‘표상’은 차라리 주관적일 것이다. 이것이 르네상스 이후에는 의식 밖의 존재자로 설정됨으로써 객관이라는 실체를 얻는 것처럼 보였다.

주관과 객관이라는 대립 개념은 칸트와 칸트에 거스른 피히테 그리고 헤겔에 이르는 관념철학의 틀을 이루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실존주의는 객관이나 객관주의를 아예 부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객관은 익숙한 개념이다. 자연주의도 사실주의도 이 같은 객관적 현실 드러내기에 그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 객관이란 행위가 얼마나 가능한가라는 원초적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어떤 경우 객관이란 외계의 대상만이 아니라 의식 내용으로서의 관념까지 내포한다. 그뿐 아니라 주관 객관의 대립은 의식 안에서의 대립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고대 인도의 한 철인도 주관에 대한 객관은 끝내 주관적 허구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불교 유식론은 주관 객관의 소멸을 통한 무심(無心)을 내세운다.

‘여시아문(如是我聞)’-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여기서 내가 들은 말이 아무리 정확하더라도 이미 내 의식이 거기에 반영됨으로써 그 말을 한 사람의 의식을 떠난 것이 아닌가. 모든 살아 있는 것은 결국 주관인가.

고은 시인·서울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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