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고맙다, 길거리 밴드

  • 입력 2007년 11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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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었다면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없겠죠….”

아일랜드 더블린의 거리. 기타를 든 남자는 길 한쪽에 서서 노래를 부른다.

청소기 수리공인 그에게 음악은 헤어진 여자친구를 잊고 마음을 달래기 위한 방법.

어느 날 그의 앞에 한 여자가 멈춰 선다. 그녀는 노래를 듣다 그가 이별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알아차린다. ‘길거리 악사’에게 손을 내민 그녀는 이렇게 얘기한다. “당신의 음악에는 인생이 담겨 있는 듯해요.”

국내에서 10만 관객을 돌파한 아일랜드 독립영화 ‘원스’는 길거리 악사인 청소기 수리공과 그의 음악에 매료된 한 유부녀의 이야기를 담았다. 때론 부랑아가 나타나 돈 가방을 훔쳐 달아나기도 하지만 그는 시간만 나면 기타를 메고 길거리로 나섰다.

그에겐 길이 곧 공연장이요, 삶을 외치는 무대이기 때문에….

2007년 11월. 한국의 길거리 악사들도 길을 떠난다.

일명 ‘버스킹’(busking·길에서 공연하거나 연기하는 행위)이라 불리는 길거리 공연 밴드는 국내에만 200여 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 부산, 대구 등 전국 곳곳에서 이들을 만날 수 있다.

록부터 재즈 국악 제3세계 음악 등 장르도 다양하다. 커다란 악기 가방을 든 이들이 믿는 건 튼튼한 두 다리뿐이다. 무대에 오르기 전 운동화 끈을 조인다.

심호흡도 한 번 해 본다. ‘오늘은 어떤 사람들을 만날까.’

조명도, 환호도 없는 길 한복판. 오늘도 쇼는 시작됐다.

하루 동안 서울 길거리에서 밴드 4팀을 만났다. ▶dongA.com에 동영상》


▲ 동영상 촬영 : 박영대 기자

#PM 12:00

홍익대 앞 혼성밴드 ‘캐비닛 싱어롱즈’

“우리 초상권이 없거든요∼ 공연하는 동안 사진 마음껏 찍으세요.”

“저흰 순수 한국인들입니다. 무서워하지 마세요.”

지나가던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이들, 말솜씨를 보니 ‘이 바닥’에서 꽤나 오래 버틴 듯했다. 재미난 ‘선전포고’에 이어 연주가 서울 홍익대 앞에 울려 퍼졌다. 시끄럽다며 종종걸음을 걷는 어르신, 길거리 공연이 신기한 듯 카메라로 모습을 담는 대학생들, 노래는 모르지만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여고생들… 기타, 콘트라베이스, 트롬본, 아코디언으로 구성된 4인조 혼성 길거리 밴드 ‘캐비닛 싱어롱즈’의 공연에 대한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캐비닛 싱어롱즈’는 폴카와 포크 음악을 접목시킨 독특한 밴드다. 서울 홍익대 앞, 대학로를 비롯해 부산 해운대, 강원, 전남 해남 ‘땅끝마을’, 제주도 등 전국을 누비며 공연을 펼친 지도 3년 째. 지난해 데뷔 앨범을 발표했으며 길에서는 ‘동방신기’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3년 전 대학생이었던 이들은 우연히 길거리 음악을 시작하게 됐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공연하는 외국인들을 봤는데 즐거워 보이더라고요. 우리도 한 번 해 보자는 생각으로 무조건 뛰어들었죠. 2004년 창피함을 무릅쓰고 서울 덕수궁 돌담길에서 처음 공연했는데 할머니 한 분이 칭찬해 주셨어요. 어찌나 뿌듯했는지 지금도 공연하고 있답니다.”(차지은·여·28·아코디언)

공연 장소는 지하철역, 놀이터 등 다양하다. 때때로 예상치 못한 행인들의 반응에 당황하기도 한다.

“늦은 시간에 공연을 하면 술 드신 아저씨들이 괜히 시비를 걸거나 술을 뿌려요. 반대로 ‘나도 왕년에 음악 했다’면서 반기는 분도 많아요. 한 번은 어떤 아저씨가 저희 음악에 감동했다며 월급을 털어서 고기와 소주를 사줬어요. 하루하루 바쁘게 살지만 젊은 시절 음악에 대한 열정을 잊지 못하는 분이 많은 것 같아요.”(김목인·28·기타)

《이들의 스케줄은 일정치 않다. 하루에 여섯 곳을 다니며 공연한 적도 있다. 예정된 공연이 아닐 때는 주변 상인들이 경찰에 신고를 해 저지당한 적도 많다. 그런데도 이들이 길거리 공연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길은 음악으로 행인들과 대화할 수 있는 곳이죠. 어떻게 보면 예술가 같고 다르게 보면 백수 같기도 한 우리에게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요. 즉흥적인 상황을 맞는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요. 그게 바로 내가 살아 있는 느낌이죠.”(신재섭·26·콘트라베이스)》


▲ 동영상 촬영 : 박영대 기자

중랑천 사물놀이 가족 ‘공새미’

“대∼한민국∼ 얼쑤!”

고요한 서울 중랑천 한복판에 일대 소란이 빚어졌다. 강아지와 조깅하던 아주머니, “장군 멍군” 외치며 장기판에 빠져 있던 아저씨들이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개량 한복을 차려입은 다섯 명이 땀을 흘리며 사물놀이 한판을 벌이고 있었다. 손으로는 쉴 새 없이 장구와 징을 두드리는 이들, 마치 ‘오늘도 한바탕 해버렸네’라고 외치는 듯 눈에서는 여유로움이 배어났다. 이들은 5인조 가족 사물놀이패 ‘공새미’다.

“7년 전 첫딸이 초등학교에서 사물놀이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저도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2년 뒤 중학생이 된 딸에게 우리 가족을 가르쳐 보라고 했죠. 그 후 가족 모두가 장구채를 들게 됐답니다.”(아버지 김영기·47·한국리더십센터 강사)

김 씨의 고향인 제주 제주시 애월읍에 있는 샘물 이름을 딴 ‘공새미’는 청계천, 중랑천, 지하철역 등지에서 한 달에 한 번씩 공연하고 있다. 이번에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 첫딸 민정(18·대진여고 3년), 징을 맡은 아들 민수(15·한천중 3년), 자신보다 더 큰 장구를 치는 막내딸 현정(9·용원초 3년) 등 온 가족이 길을 나선 계기는 바로 ‘보람’이었다.

“집 근처 공원에서 사물놀이 연습을 하는데 뇌성마비 장애인들이 달려와 환호를 했어요. 어찌나 뿌듯하던지…. 그 후 이렇게 길거리에서 공연하고 있죠.”(어머니 강성미·장구)

2002년 지하철 2호선 건대입구역을 시작으로 6년 째 길거리 공연을 이어 온 이들은 2004년에는 1년 동안 유럽 각국과 인도 중국 호주 칠레 등 31개국 100개 도시를 돌며 100회 길거리 공연을 했다. 이를 위해 김 씨는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었고 아이들도 1년간 책가방 대신 악기 가방을 짊어졌다. 취미활동 치고는 다소 무리한 것 아닐까? 모두 “열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며 웃었다.

“나이, 계층에 상관없이 수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게 얼마나 짜릿한데요. 사람들은 우리 소리를 듣고 즐거워하고 그런 사람들을 보며 우리도 뿌듯함을 얻죠. 그게 바로 길거리 공연의 매력 아닐까요?” 민수 군의 말이다.


▲ 동영상 촬영 : 박영대 기자

#PM 6:00

청계천 재즈밴드 ‘더 뉴’

“어머 저 사람들 뭐야?”

서울 종로2가 청계천 장통교. 어스름한 저녁 하늘에 “치∼” 하는 재즈 드럼 소리가 깔리자 사람들이 하나 둘 멈춰섰다. 4인조 재즈밴드 ‘더 뉴’ 멤버들에게서 흘러나온 스탠더드 재즈 선율이 청계천을 적셨다. 갑자기 소리가 뚝 끊겼다. 어린이 두 명이 실수로 악기와 연결된 전기 코드를 건드리고 지나간 것. 예상치 못한 일이라 놀랄 만도 하지만 4명의 멤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코드를 꽂고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1시간 남짓한 공연을 마친 이들의 얼굴엔 아쉬움과 기쁨이 교차했다.

“날씨가 추워서 관객들이 없었나봐” “그래도 별 탈 없이 공연을 끝낸 게 어디야. 선 빠진 거 빼고….”

인터넷 재즈동호회를 통해 결성된 밴드 ‘더 뉴’는 지난해 3월부터 매 주말 청계천과 한강, 유원지 등지에서 재즈를 연주하고 있다. 실용음악학원 원장, 강사와 대학생으로 이루어진 이들은 드럼, 키보드 등 부피가 큰 악기나 앰프, 스피커 등을 갖고 다니는 게 힘들었다고 했다. 얼마 전 리더 신재현(28·음악학원 강사) 씨가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사서 악기와 멤버들을 싣고 다닌다.

“날씨에 맞추기가 힘들죠. 얼마 전 먹구름이 낀 날 청계천에서 공연을 했는데 악기 배치를 다 하고 나니 비가 왔어요. 악기 꺼낸 것이 아까워서 일단 연주를 시작했는데 10분 지나니까 막 퍼붓더라고요. 감전될까봐 부들부들 떨었는데 금세 비가 멈췄어요. 비 맞으면서 공연을 한 멤버들에게도 고마웠지만 우산을 쓰고 저희 음악을 끝까지 들어준 시민들이 더 대단했어요.”(김현경·23·베이스)

웃으며 재즈 연주를 하는 이들에게 “지금 웃고 장난치느냐”며 화를 냈던 한 아주머니, “멋있다”고 응원해 준 고교 동창생, 동전을 던지며 무대 앞을 소란스럽게 한 어린아이 등 이들이 만난 사람들의 표정은 각양각색이었다. 즉각적이고 다양한 반응이 온다는 것은 분명 실내 공연장에서 느끼지 못하는 쾌감이다. 이들의 목표는 “길거리에서 무슨 짓이냐”며 여전히 반대하는 부모님에게 멋진 길거리 공연을 보여 드리는 것.

“겨울에도 저희는 변함없이 길에 나와 연주를 할 겁니다. 춥지 않으냐고요? 이게 우리 행복이니까요.”(김승현·23·기타)


▲ 동영상 촬영 : 박영대 기자

#PM 7:00

올림픽공원 7080밴드 ‘CAU 74’

“대학시절 기타를 치며 느꼈던 즐거움을 30여 년 만에 다시 찾았습니다. 50대에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치를 하고 있는 거죠.”(노정훈·51·기타·리더)

이들이 말한 ‘사치’는 음악이었다. 7080 밴드 ‘시에이유(CAU) 74’ 밴드는 50대 직장인으로 구성된 밴드로 올 봄부터 잠실 올림픽공원 등 길거리에서 한 달에 한 번씩 공연하고 있다.

부동산 중개업, 무역업, 인테리어 시공업 등 직업도 각기 다른 이들은 조용필의 ‘모나리자’ ‘물망초’, 라이너스의 ‘연’, 비틀스의 ‘렛 잇 비’ 등 중장년층이 좋아하는 노래들을 부르고 있다. “아직은 아마추어”라며 겸손해한다. 하지만 이들의 공연장에는 학교 동문과 동네 주민 등 100여 명의 시민이 환호를 보낸다. 매번 양복을 차려입고 오는 노신사는 이들의 골수 팬이다.

중앙대 74학번 동기들로 구성된 이 밴드는 2004년 모교 ‘홈커밍데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누군가 ‘밴드를 만들어 공연하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3명으로 급조된 팀이 450명의 동문 앞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다.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서로의 연주가 딱딱 맞아떨어질 때는 얼마나 짜릿한지 황홀경 그 자체랍니다. 전 미국에 사는데도 밴드 활동을 위해 자주 한국을 방문하고 있어요.”(강성환·52·베이스)

매주 금요일 저녁에 모여서 연습하는 이들은 오전 1∼2시를 넘기기 일쑤다. 초기에는 아내에게 길거리 밴드 활동 사실을 숨긴 멤버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내들이 나서서 응원하고 있다. 50대에 ‘거리의 악사’가 된 이들은 요즘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지금은 직장생활과 밴드 활동을 겸하고 있지만 은퇴한 뒤에는 전업 길거리 밴드로 활동하고 싶어요.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갈 준비가 돼 있답니다.”(노정훈)

글=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사진=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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