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따라잡기]‘현대예술 거장 시리즈’의 힘

  • 입력 2007년 11월 10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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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박영률출판사’의 박영률 대표를 만났을 때 일이다. 펄떡이는 강한 눈빛을 지닌 그는 한 가지 포부를 들려줬다. “내년부터 역사 철학 자연과학을 망라한 3600종 총서를 낼 겁니다.” 점심 얘깃거리치곤 거하다 싶던 박 대표의 말에 스무 차례쯤 반복되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백 리스트(back list).’

백 리스트는 말 그대로 출판사의 근간(根幹)이 되는 목록이다. 통상 1년에 1000부 정도씩 나가는 책들이다. 일종의 스테디셀러를 뜻한다.

출판계의 백 리스트 사랑은 베스트셀러 저리 가라다. 깜짝 대박보다 지속성 있는 장서 확보가 경영에도 낫단다. “몇백만 부 ‘초대박’을 낸 출판사를 보세요. ‘배꼽’을 냈던 장원, ‘손자병법’ ‘영웅문’의 고려원, 시집 ‘홀로서기’의 청하…. 다 문 닫았습니다. 오죽하면 ‘베스트셀러 출판사는 망한다’는 속설이 있겠어요.”(성의현 ‘미래의 창’ 대표)

실제로도 매출규모 상위권 출판사들은 백 리스트가 풍성하다. 민음사 김영사 랜덤하우스 웅진. 모두 백 리스트가 1000종이 넘는다. ‘베스트셀러 메이커’라 불렸던 박 대표가 백 리스트를 부르짖는 이유다. 대형기획이나 시리즈전집 역시 백 리스트 만들기 작업의 하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주 신간 하나가 눈에 띈다. ‘쳇 베이커: 악마가 부른 천사의 노래’(을유문화사). 최고의 재즈 트럼펫 연주자, 쳇 베이커의 삶을 다뤘다. 책이 반가운 건 재즈에 대한 관심 때문만은 아니다. ‘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 14번째 편이어서다.

2004년부터 시작한 이 전집은 독특한 시리즈다. 한국에서 인기 없다는 인물평전이다. 그렇다고 고전적 의미의 위인전도 아니다. 쳇 베이커만 해도 마약에 취해 연주하며, 자식에겐 돈 한 푼 주질 않았다. 존경은커녕 삶의 썩은 내가 풍긴다.

책은 또 얼마나 두꺼운지. 한 권 한 권이 거의 사전이다. 8번째 권 ‘히치콕: 서스펜스의 거장’은 장장 1376쪽에 달한다. 가격도 4만8000원이다. 1권짜리 원서를 3, 4권으로 나눠 내는 세상에. 미련도 하다.

놀라운 건 이 시리즈가 은근히 성적이 좋다는 거다. 신간을 빼고 시리즈 13권이 모두 재판을 찍었다. 최소 2000부 이상이다. 사진작가 ‘헬무트 뉴튼’(3권)과 ‘브레송’(9권),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7권), 영화감독 ‘트뤼포’(10권)는 3쇄를 넘겨 4000부가 넘었다.

이 시리즈의 강점은 약점처럼 보였던 미련함에 있다. 연주로, 춤사위로, 셔터로만 말하던 현대 예술의 거장을 우리 앞에 데려왔다. 우리와 닮은 거장의 숨결 그대로 인간과 예술의 거리를 가늠케 한다. 에두르지도 포장하지도 않는다. 양장본에 차곡차곡 담은 가치를 독자들은 알아봤다.

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는 계속된다. 을유문화사 측은 “패션디자이너 코코 샤넬, 국내 국악인 임방울이나 연극인 추송웅 등으로 외연을 넓힐 예정”이라고 전했다. 묵직한 인문서적이 만화책처럼 그 다음 권이 기다려지는 이유. 출판사의 백 리스트, 그건 바로 독자에게도 독서의 등뼈가 되기 때문이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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