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풍백화점’은 정이현(35) 씨의 자전소설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무소속’이 되어 국립중앙도서관을 갔다가 삼풍백화점으로 향하는 여자는 작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일 것이다.
어딘가에 적(籍)을 둬온 관성 때문에 좀 속물스러운 치과의사와 맞선을 봤다고 해서 대단한 상처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소설은 평탄하게 자란 중산층 장녀가 어떻게 글쓰기를 시작했는가를 보여준다.
많은 것이 주어진, 안온한 가정에서 자라난 강남 소녀가 어떻게, ‘상처로부터 솟아난다’는 문학의 길을 선택했는지를.
정 씨의 새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문학과지성사)은 “콤플렉스 없는 세대”(평론가 김병익)의 글쓰기가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그 세대는 ‘호출기에서 핸드폰으로, 아이러브스쿨에서 미니홈피로 장난감을 바꾸고’(‘삼풍백화점’) ‘스타벅스의 아이스모카를 마시고 국산 맥주보다 이천 원 더 비싼 벨기에산 호가든을 주문하는’(‘오늘의 거짓말’) 젊은이들이다.
작가가 묘사하는 삶은 확실히, 선배 작가들이 짊어졌던 전쟁의 공포나 체제에 대한 저항과는 구별된다. ‘다른 인생’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그의 소설은 앞선 한국문학과 선을 긋는다.
첫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 발칙한 위악을 통해 기성 문학에선 낯선(그러나 현실과 너무나 닮은) 여성상을 묘파한 정이현 씨. 단편 10편이 묶인 ‘오늘의 거짓말’은 여전히 발랄하고, 재미있고, 그 세대의 실제 삶과 매우 닮아 있지만, 좀 더 ‘문학적’이다.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맞선본 여자에게 무덤덤하던 남자가 “이번에는 남자친구와 정말 잘해 보고 싶어 하는” 전처를 따뜻하게 보듬는다든지(‘타인의 고독’), 대학 동기가 소녀 시절 이후의 기억을 잊은 것을 알고, 자신만이 되새길 수 있는 동기와의 기억을 떠올리며 만남을 이어가는 ‘위험한 독신녀’ 같은 소설이 그렇다.
다시 자전소설 ‘삼풍백화점’으로 돌아가서, 그가 소설을 쓰게 된 것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의 충격 때문이 아니라, ‘대졸 실업자’의 막막함을 나눠가졌던 동창이 백화점에서 죽어버려서다.
무엇이 글 쓰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 모든 작품을 통한 정 씨의 답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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