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7년 소련, 샤란스키 간첩죄 기소

  • 입력 2007년 6월 1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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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 샤란스키. 우크라이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체스 천재’로 불렸다.

눈가리개를 한 채 체스 판을 오가며 어른 여럿을 동시에 상대해 이기곤 했다. 명문 모스크바물리기술대에서 응용수학을 전공한 그는 컴퓨터 전문가로 성장했다.

그런 전도양양한 청년이 맹렬 반공주의자로 변신하게 된 것은 1973년 소련 당국이 국가안보를 이유로 출국비자를 거부하면서부터였다.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의 영어통역으로 일하게 된 그는 인권단체 ‘헬싱키 그룹’ 결성을 주도해 당국의 표적이 됐다.

그가 체포된 것은 1977년 3월. 소련 당국은 2개월 넘게 조사한 끝에 6월 1일 그를 반역 및 간첩죄 혐의로 기소했다. 소련 내 분란 조성을 위해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자금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듬해 13년의 강제노동 형을 선고받은 그는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 했다. 기나긴 감금생활 동안 그는 마음속의 상대와 체스를 두곤 했다.

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웃는 것이었다. 유머란 자유로울 때는 사치스러운 것이지만 감옥에서는 유일한 무기다.”

그는 9년 뒤에야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1986년 2월 비행기에 실려 동독 땅에 도착한 그는 베를린의 글리니케 다리에서 소련 스파이들과 교환됐다. ‘자유를 향해 똑바로 가라’는 지시에 그는 갈지자걸음으로 다리를 건넜다. 마지막 항거의 몸짓이었다.

이스라엘로 이주한 뒤 히브리어 나탄(‘주다’ ‘맡기다’라는 뜻)으로 이름을 바꾼 그는 정계에 투신해 부총리, 건설장관, 내무장관, 이민장관을 지내다 지난해 이스라엘 정부의 가자지구 내 정착촌 철수 정책에 반발해 장관직을 사임했다.

그는 팔레스타인과의 평화를 거부하는 강경 시온주의자. 이 때문에 인권 존중이 최우선 가치라는 그의 주장이 이중적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하지만 그는 미국에 든든한 후원자를 뒀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내 생각을 알고 싶거든 샤란스키의 책 ‘민주주의를 말한다(The Case for Democracy)’를 읽어 보라”고 추천했다. 전 세계적 민주주의 확산과 폭정 종식이라는 미국 외교정책이 여기서 나왔다.

샤란스키는 세계를 자유사회와 공포사회로 나누며 ‘광장 실험(town square test)’이라는 기준을 제시한다. 누구든 광장 한가운데에서 두려움 없이 자신의 견해를 발표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자유사회지만 그게 아니라면 공포사회라는 것이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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