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점령군이 바뀌면 神의 이름이 바뀌었다

  • 입력 2006년 12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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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대표적 건축물인 거대한 돔형 성당 아야소피아가 아시아와 유럽 두 대륙 사이에 놓인 보스포루스 해협을 등지고 서 있다. 사방의 미나레트(첨탑)는 이슬람 사원의 상징이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옛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대표적 건축물인 거대한 돔형 성당 아야소피아가 아시아와 유럽 두 대륙 사이에 놓인 보스포루스 해협을 등지고 서 있다. 사방의 미나레트(첨탑)는 이슬람 사원의 상징이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거대한 원형 돔 내부는 복층구조 2층 구조의 거대한 아야소피아 내부. 천정의 원형돔을 받치고 있는 중간부분(펜던티브)의 노란빛 아라베스크 장식은 오리지널 성화를 가리기 위해 오스만제국 당시 회칠을 하고 그 위에 그린 것.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거대한 원형 돔 내부는 복층구조 2층 구조의 거대한 아야소피아 내부. 천정의 원형돔을 받치고 있는 중간부분(펜던티브)의 노란빛 아라베스크 장식은 오리지널 성화를 가리기 위해 오스만제국 당시 회칠을 하고 그 위에 그린 것.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500년만에 햇빛 본 모자이크 벽화 아야소피아 2층 회랑벽의 오리지널 모자이크 화. 유리에 금을 입혀 하나하나 박아 넣어 완성한 이 모자이크벽화는 회분으로 덧칠한 벽속에 500여 년간 갇혔다가 1930년대에 빛을 보았다.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500년만에 햇빛 본 모자이크 벽화 아야소피아 2층 회랑벽의 오리지널 모자이크 화. 유리에 금을 입혀 하나하나 박아 넣어 완성한 이 모자이크벽화는 회분으로 덧칠한 벽속에 500여 년간 갇혔다가 1930년대에 빛을 보았다.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 터키 이스탄불 아야소피아 성당

《요즘 터키의 이스탄불에 세상의 시선이 쏠렸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아야소피아’ 성당방문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이라크전쟁 등을 계기로 이슬람 대 비(非)이슬람 문화권의 충돌이 우려되는 어수선한 지구촌. 이번엔 교황의 구 비잔틴성당 방문이 이슬람 대 가톨릭의 종교 간 갈등으로 비화되니 걱정스럽기만 하다. 아야소피아는 어떤 곳이고 교황은 왜 이곳을 굳이 찾으려 하는가. 아야소피아 성당을 찾아 이스탄불로 여행을 떠난다.》

서기 537년 완공… 건축기술 아직도 불가사의

기독교-이슬람 교회 最古모델로 두얼굴 간직

때는 1453년 5월 29일.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은 풍전등화의 위급한 상황에 놓였다.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1451∼1481)가 맹렬한 기세로 공세를 폈기 때문. 골든혼(이스탄불의 좁은 바닷길)에 쇠줄을 가설해 적선의 접근을 봉쇄하기는 했지만 언제 뚫릴지 알 수 없었다. 우려는 적중했다. 21세의 혈기왕성한 술탄은 선박 67척을 동원해 부교를 만들어 장애물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이렇게 무너졌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그것은 단순히 비잔틴제국의 몰락에 그치지 않았다. 이슬람에 의한 기독교의 패퇴를 의미했다. 이로써 이슬람은 페르시아 만으로부터 훗날 빈(오스트리아)에 이르는 이슬람제국의 흥성을 기약하게 됐다. 반면 유럽은 그만큼 위축돼 암흑시대에 들어선다. 아야소피아는 이런 두 종교권 간 다툼의 틈바구니에 낀 역사의 현장이다.

1500만 명이 사는 거대 도시 이스탄불.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둔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의 양단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은 ‘대륙적’ 도시다. 이스탄불은 또 다른 로마제국인 비잔틴의 옛 수도답게 로마를 빼 닮았다. 일곱 개의 언덕 지형이 그렇다. 이른 아침, 술탄의 거처였던 토카프 궁전에서 바라본 이스탄불 시내. 그 언덕마다 미나레트(이슬람사원인 모스크의 첨탑)가 불쑥불쑥 치솟은 모스크가 들어섰다. 술탄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직후 이름을 이슬람식으로 바꿨다. ‘이스탄불’은 그 자체가 ‘이슬람이 많이 산다’는 뜻이다.

이스탄불 중심가에는 비잔틴 유적도 가끔 눈에 띈다. 원형경기장의 일부인 히포드럼 광장과 오벨리스크, 아야소피아(성당)가 그것. 아야소피아만큼 이스탄불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유적도 없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전 비잔틴제국에서는 정교회 총주교가 있는 주교좌성당(537∼1453년), 술탄이 지배한 오스만제국에서는 모스크(1453∼1922년), 그리고 케말 아타튀르크 대통령이 이끈 터키(1935년)에서는 박물관으로 쓰였다. 그때마다 이름도 달랐다. 성당은 하기아소피아(그리스어), 모스크는 아야소피아(터키어), 현재는 아야소피아 뮤지엄.

시대마다 용도와 이름은 바뀌었지만 그 뜻은 같다. ‘신의 예지’(Holy Wisdom of God)다. 물론 그 신은 다르다. ‘하기아소피아’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인데 반해 아야소피아의 신은 마호메트다. 이 건축물이 양 종교에 미친 영향은 대단하다. 하기아소피아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교회로 이후 돔형건축의 모델이 됐다. 아야소피아 역시 모스크로 대표되는 이슬람건축의 원형이 됐다.

이스탄불에서 아야소피아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골든혼의 아타튀르크 다리를 건너 시르케즈 역(철도)을 지나 좁은 언덕길로 오르자 블루 모스크와 함께 아야소피아가 보였다. 시르케즈 역은 터키와 불가리아를 잇는 철도의 출발역. 애거사 크리스티가 쓴 추리소설 ‘오리엔트특급 살인사건’에도 등장한다.

아야소피아를 처음 본 순간 육중하고도 거대한 외관에 압도당했다. 1469년 전 서기 537년 건축물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건축의 백미는 지붕의 돔이다. 높이 56m, 동서 31.8m, 남북 30.9m의 원형에 가까운 반구형. 당시 이 돔을 벽체 위에 올려놓은 건축기술은 아직도 불가사의다. 5년 10개월의 단기간에 완공한 것 역시 그렇다.

거대한 실내의 화려한 인테리어도 입을 벌리게 한다. 돔 천장은 모자이크로 표현한 판토크레이토(우주의 지배자로서 그리스도)로 장식됐고 그 하단에는 40개의 창을 달았다. 그 창은 빛을 끌어들여 돔 천장의 구석구석을 비춘다. 원형 돔을 사각구조의 벽 위에 놓기 위해 개발한 접합구조 역시 기발하다. 미려한 외관은 물론 하중계산까지 완벽했다.

아야소피아의 수난은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더불어 시작돼 오스만제국 하에서 수백 년간 이어졌다. 그것은 성당을 모스크로 바꾸는 작업이었고 ‘아야소피아 뮤지엄’의 전시물은 바로 그 현장이다. 벽은 곳곳이 훼손됐는데 모두 아이콘(성화)이 있던 자리다. 사람 형상은 모두 ‘우상숭배’로 간주해 철거됐다. 노란색 바탕에 아름다운 아라베스크 장식의 돔 천장 역시 어수선하다. 일부는 뜯겨져 나갔는데 거기에 빛바랜 판토크레이토 모자이크화가 보인다. 술탄은 판토크레이토를 가리기 위해 그 위에 회분 칠을 한 뒤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장식했다. 뜯겨진 부분은 1930년대 시작된 판토크레이토 복원 작업 현장. 기둥마다 마호메트와 초대 칼리프(후계자)의 이름, 코란 구절 등이 씌어 있다.

두 종교 틈에서 힘겨운 역사를 보낸 아야소피아. 현재는 박물관으로 바뀌어 이스탄불을 찾는 수많은 관광객의 관심 속에 잘 보존되고 있다. 그래도 그 갈등에서 온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1932년 미국비잔틴연구소의 복원작업이 개시됐지만 ‘복원’ 자체가 이슬람권에는 또 다른 ‘훼손’으로 간주된다. 복원마저 양 종교 틈새에서 줄타기를 하는 형국이다. 교황의 터키 방문 역시 마찬가지. 화해와 용서를 미덕으로 삼는 종교지만 교황의 ‘하기아소피아’ 방문은 ‘아야소피아’의 터키인 반대에 부닥쳐 종교간 갈등으로 번지고 있다.

이스탄불(터키)=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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