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1년 농어촌 고리채 정리법 공포

  • 입력 2006년 7월 12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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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농어민의 환심을 사려는 지도자들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농어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민심을 얻는 중요한 방법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혁명 주체세력’은 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 농어촌 경제활성화 방안을 강구했다.

이들은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는 선언을 혁명 공약으로 내세운 바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기본경제계획의 일환으로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공포한 데 이어 농어촌 경제의 안정과 성장 발전이란 명분을 내세워 농어촌 고리채(高利債)정리법 시행령을 공포했다. 1961년 7월 12일의 일이다.

당시 농어민들은 고리채에 시달리고 있었다. 빚을 갚기 위해 또 빚을 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높은 이자 부담으로 시름은 깊어만 갔다.

이들에게 농어촌 고리채정리법 시행령은 귀가 번쩍 뜨일 만한 지원책이었다.

이 시행령은 우선 농어민의 고리채를 신고하게 한 뒤 채권자에게는 연리(年利) 20%의 농협금융채권을 지급하고 농어민에게는 연리 12%의 고리채 정리 자금을 융자해 주는 것이었다. 농어민들이 안고 있던 빚은 2년 거치 5년 분할 상환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1961년 12월 말까지 모두 480억 환의 농어민 채무가 신고됐다. 이 가운데 61%에 해당하는 293억 환이 농어촌 고리채로 판명됐다. 정부는 전체 신고액의 52%에 해당하는 249억 환의 융자를 농어민들에게 해 줬다.

그러나 정부의 농어촌 고리채정리법은 결과적으로 큰 성과를 보지 못했다. 농어촌의 낮은 소득 등으로 이들이 다시 고리채를 갖다 쓰는 현실이 되풀이됐기 때문이다.

수십 년이 흐른 뒤에도 부채로 인한 농어민들의 시름은 여전히 깊다. 자유무역 기치를 내건 우루과이라운드를 비롯한 개방화 파고(波高)는 농어민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농어촌의 강한 거부감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세계화라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 속에서도 농어민들이 고리채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묘안’은 없을까.

김상수 기자 s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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