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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6년 3월 13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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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소리 소문 없이 모임 하나가 만들어졌다. 50여 명의 작가, 저명인사가 참여한 ‘이병주 기념사업회’가 바로 그것. ‘산하’ ‘지리산’ 등 대작을 남긴 소설가 이병주(1921∼1992)를 재발견하자는 모임이다. 문학평론가인 김윤식 전 서울대 교수와 정구영 전 검찰총장이 공동회장을 맡았다.
특이한 점은 이 모임에 우리 사회 진보와 보수 양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골고루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50여 명의 발기인에는 진보적 성향의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과 보수적 성향의 소설가 이문열 씨가 함께하고 있다. 진보적 사상가의 좌장 격인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참여했는가 하면 전두환 정부의 실세였던 허문도 전 국토통일원 장관의 이름도 올라 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원로 영화배우 최지희 씨도 참여했다.
이념적 지향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한 작가를 재평가하는 작업에 이렇게 모여든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미국에 머물고 있는 이문열 씨는 10일 전화통화에서 “그간 폄훼돼 온 이병주 문학을 재평가하기 위해 사람들이 이념이나 섹티즘(Sectism·파당주의)에 편중되지 않고 모여 감동스러울 정도”라며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병주 문학의 웅장한 서사성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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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한국 문단은 이병주의 문학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를 꺼렸다. 문학을 가린 그의 삶의 이력 때문이다.
그는 박정희 정권 때 한반도 영세중립국화를 주장하는 논설을 써 구속돼 복역까지 했으면서도 말년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문을 최종 검토해 구설에 올랐다. 1991년에 펴낸 ‘대통령들의 초상’에서는 12·12가 쿠데타가 아니라는 평가를 내려 논란이 일기도 했다. 진보 진영에서 배척당한 만큼 보수 진영에서 제대로 대접받은 것도 아니었다. 작가 스스로 얻어 낸 당대의 명성 때문에 되레 진지한 평론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
이번에 진보와 보수 진영의 인사가 함께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이야기 소설, 서사문학의 부활이 필요하다는 데에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임 소장은 “이병주 문학은 좌익이든 우익이든 인간의 얼굴을 가진 민족운동을 한다면 반드시 거쳐야 할 산봉우리”라며 “미시 담론과 재담이 지배하는 한국 문단에 서사의 부활을 가져오기 위해서라도 이병주의 재발견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생전에 이병주의 교류 스펙트럼이 워낙 넓었던 것도 이념을 뛰어넘은 결집의 요인이다.
리 전 교수는 “문학과 관계없이 언론인, 지식인으로서, 술친구로서, 한 시대 같은 인생을 살아온 또래로서 참여했다”고 말했다.
허 전 장관은 “문공부 차관 시절 한 송년회 자리에서 이병주 선생을 처음 만나 친해졌는데 그분은 권력의 혜택을 받은 적도 없고 권력 현상을 인간 백태의 한 단면으로 관찰한 분”이라고 말했다.
정 전 총장은 동향(경남 하동)의 인연으로 기념사업회 일을 맡게 됐다.
기념사업회는 다음 달 출범식을 열고 본격적 활동을 시작할 예정이다.
한길사는 4월에 ‘산하’ ‘지리산’ ‘관부연락선’ ‘그해 5월’ 등 이병주의 대표작을 모은 30권짜리 전집을 발간한다. 또 이병주 문학제, 포털사이트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이야기 소설 공모 등의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김언호 한길사 사장은 “진보와 보수 진영이 그간 ‘떠도는 고혼’이었던 이병주 재평가를 위해 모인 것이 문단과 사회에서 대화합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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