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시]류기봉/‘가지치기’

  • 입력 2005년 12월 8일 0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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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포도나무를 가위로 자르면

겨울잠을 자는 새가 떨어진다.

가지 끝에 달빛을 올린

새의 집, 그 새의

휴식처를 땅바닥에 팽개친다.

그런 날은 나도 하늘도 몹시 아프

고 쑤신다.

하늘을 보니 일그러진 하늘

쭈글쭈글 오므라든 가지여,

또 눈이다.

눈이 온다. 땅에 흰 눈이 덮인다.

새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새와 달빛과

별빛들

흔적들이 사라진 빈 들판에 서서

헛가위질만 계속했다.

-시집 ‘포도눈물’(호미) 중에서》

웃자란 포도나무 가지를 잘라내면서도 왜 저리 머뭇거리는가 궁금했었죠. 노루 꼬리처럼 짧은 해, 허운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 사나운데 전지가위 든 저 농부 왜 저리 멈칫거리는지 유심히 보았죠. 나뭇가지 하나도 새의 거처인 걸 생각하고 계셨군요. 마른 나뭇잎 하나도 달빛과 별빛의 거처인 걸 생각하고 계셨군요. 흰 눈이 내리고 바람이 쓸고 가는 들판조차 뭇 생명들의 길목인 걸 떠올리고 계셨군요. 빈 가지 하나 치는 것도 이렇게 아픈 일이거늘―.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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