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하나님 놀다 가세요-신현정

  • 입력 2005년 9월 22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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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거기서 화내며 잔뜩 부어 있지 마세요

오늘따라 뭉게구름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들판은 파랑물이 들고

염소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는데

정 그렇다면 하나님 이쪽으로 내려오세요

풀 뜯고 노는 염소들과 섞이세요

염소들의 살랑살랑 나부끼는 거룩한 수염이랑

살랑살랑 나부끼는 뿔이랑

옷 하얗게 입고

어쩌면 하나님 당신하고 하도 닮아서

누가 염소인지 하나님인지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거예요

놀다 가세요 뿔도 서로 부딪치세요

-시집 ‘자전거 도둑’(애지) 중에서

하나님, 그렇게 하셔요. 한 사나흘 다리 쭉 펴고 맘 편히 놀다 가셔요. 하나님 찾는 이들 십중팔구 골치 아픈 소원이나 늘어놓기 일쑤인데 저 시인이 부르는 소리 좀 보세요. 달라는 것, 요구하는 것 하나도 없네요. 외려 과중한 우주 경영에 쌓인 스트레스 푸시라고 살랑살랑 염소 떼와 나부끼라니요. 어서 그렇게 하셔요.

누가 염소인지 하나님인지 모르니, 염소도 하나님처럼 대해야겠어요. 혹시 모르니까 양과 토끼와 뭉게구름도 하나님처럼 대해야겠어요. 아니, 날마다 만나는 사람과 짐승과 나무와 물고기들도 하나님처럼 대해야겠어요. 이런! 하나님이 숨으시니 하나님이 도처에 계시는군요.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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