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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5년 6월 18일 07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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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은 누구를 막론하고 합법적 재판 또는 국법에 의하지 않는 한 체포, 감금, 법익(法益) 박탈, 추방 또는 그 외의 어떠한 방법에 의하여서라도 자유가 침해되지 아니하며, 왕 스스로가 자유민에게 개입하거나 관헌을 파견하지 아니한다.’
인간의 태생적 자유와 법에 의한 통치를 못 박은 ‘마그나 카르타’(대헌장·大憲章) 36조. 이후 세계 각국의 근대 헌법에 원용되며 억압 속에 사는 모든 인간에게 희망의 횃불 역할을 해왔다. 무엇보다도 이 헌장의 가장 놀라운 점은 저자가 제목에서 강조하듯 무려 800여 년 전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4세기가 흘러서야 국민의 권리를 명시한 ‘권리청원’(1628) ‘권리장전’(1689)이 등장했고, 이로부터 오늘날까지 비슷한 시간이 흘렀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계몽주의’ ‘시민권’이라는 용어조차 생기기 전에 등장한 대헌장의 선진성은 더욱 뚜렷해진다. 어떤 시대적 여건이 이 같은 혁신적인 선언을 가능하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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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헌장은 경제적으로는 풍요를 누렸지만 정치적으로는 이에 걸맞은 리더십이 부재했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잉글랜드의 노르만 정복 이후 대헌장에 서명한 존 왕에 이르는 일곱 명의 왕이 모두 반란을 겪었다. 그나마 존 왕 이전까지는 귀족들이 왕의 형제나 인척을 내세우며 반란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었지만, 존 왕에게는 왕위 계승권을 내세울 형제도, 가까운 친척도 없었다. 반대 세력으로선 시민층까지 겨냥한 ‘개혁과 자유, 권리’라는 명분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통치자인 존 왕의 비열함도 역설적으로 대헌장의 성립에 큰 몫을 한 요인이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전선에는 한사코 가지 않아 ‘겁쟁이나 그를 믿을 것’이라는 빈축을 들었다. 패전이 계속되면서 그는 자신에게 ‘정치 헌금’을 낸 귀족들에게 마땅한 관직도, 토지도 내릴 수 없었다. 군사적 실패를 과도한 세금으로 충당하면서 원성은 극에 달했다.
이런 정황을 감안한다 해도, ‘발칙하게’ 국왕에게 요구조건을 내놓고 서명을 받은 행위가 당시 어떻게 가능했을까. 115년 전인 1100년 헨리 1세가 그로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선례를 남긴 탓이었다. 그는 귀족들의 환심을 사고 형제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선왕들의 불합리한 관행을 열거하며 ‘모든 악법을 폐지하겠다’는 내용의 헌장을 발표했던 것이다. 이후 ‘문서로 왕권을 제약할 수 있다’는 관념을 귀족들은 결코 잊지 않았다.
특히 이 같은 정치적 리더십 부재와 대비되는 당대 영국 사회의 경제적 풍요를 상세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 책은 남다르다. 12세기 영국 농촌은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18세기와 맞먹을 정도로 선진적인 농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광대한 숲과 소택지, 습지 등이 개간돼 전체 농경지 면적이 오늘날과 비슷해졌다. 배후지의 생산력이 확대되면서 1180년부터 1230년까지 50년간 57개나 되는 새로운 도시가 생겼다.
‘아라비아의 금, 탐스러운 야자에서 뽑은 기름, 나일강의 보석, 중국의 진홍 비단….’ 당대 문인의 시 구절에 나타나는 보화의 목록은 당시 실제 런던의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품목들이었다. 이 같은 사회적 풍요를 바탕으로 부와 실력을 축적한 귀족들은 ‘자유’를 기치로 절대왕권에 대항할 수 있었다. ‘경제성장이 민주화의 전제 조건이 된다’는 근대 정치학의 명제가 13세기 영국에서 이미 실증되었던 것이다. 원제 ‘1215: The Year of the Magna Carta’(2003년).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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