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의 거장들]<4>터키 소설가 오르한 파묵

  • 입력 2005년 5월 1일 19시 10분


코멘트
동아일보 자료사진
동아일보 자료사진
나는 터키 유학시절에 그곳 작가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의 소설을 처음 접하고는 매료됐다. 이전에 나왔던 그의 작품 모두를 쌓아놓고 밤새 섭렵했다. 지금도 그가 어떤 소설을 내놓을까 촉각을 세운다. 그의 소설 ‘새로운 인생’의 첫 구절은 이렇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인생이 바뀌었다.” 내 경우 파묵의 소설이 ‘나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그의 소설의 번역가가 됐으니….

좋은 작가는 천부적 재능 외에도 탁월한 지적 수준, 통찰력, 감수성, 그리고 상상력을 겸비해야 한다. 자신만의 고유한 색채, 즉 독특한 표현 방식도 가져야 한다. 각고의 근면성도 필요하다. 파묵은 이런 요소를 두루 갖췄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사는 터키는 유럽과 아시아 대륙의 접점에 자리했다. 동서 문화가 교차하는 통로 역할을 해왔다. 파묵은 작품들에서 오스만제국의 역사를 재료로 동서양 문화의 화해를 모색해 온 터키 역사의 탐구자로서 독보적 입지를 굳혔다. 그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소설 ‘하얀 성’에서는 주인공이 동고동락하는 동양인과 서양인이다. 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서는 신(神) 중심의 회화기법인 이슬람 세밀화와 인간 중심의 서양화 스타일이 충돌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최근작인 ‘눈(雪)’ 역시 이슬람 머릿수건을 착용하는 소녀들의 자살 문제를 통해 서구와 이슬람 문화의 갈등을 다룬다. 특히 ‘내 이름은 빨강’은 프랑스 이탈리아 아일랜드에서 손꼽히는 문학상을 받았으며, ‘눈’은 2004년 ‘뉴욕타임스 선정 올해의 책’으로 뽑히는 등 파묵의 성가는 해를 더해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파묵은 1952년 이스탄불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명문 로버트 칼리지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이스탄불 공대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3학년 때 적성에 안 맞다는 이유로 자퇴한다. 1974년 전업 작가가 되기를 선언한 뒤 지금까지 글쓰기에만 전념하고 있다.

2000년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오르한 파묵의 겨울 집필실에서 만난 파묵(왼쪽)과 이난아 교수. 사진 제공 이난아 씨

그와 나의 인연은 1998년에 시작됐다. 나는 그해 겨울 ‘새로운 인생’을 번역한 뒤 역자 후기를 준비하려고 이스탄불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겨울 집필실은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스탄불 중심가에 있었다. 우리는 터키 문학과 그의 작품에 대해 밤늦게까지 이야기했다. 그는 “여름에 이스탄불에 와라. 내 여름 집필실로 초대할 테니 거기서 번역해도 된다”고 말했다. 그저 인사치레려니 했는데 그는 지난해 여름 그곳으로 나를 초대했다. 그의 여름 집필실은 이스탄불 근처 헤이벨리 섬에 있다. 번역자로서 작가와 오래 토론하며 그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건 특별한 행운이었다.

나는 “소설 구상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독자의 영혼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그들의 마음을 어떻게 빼앗을 수 있을까 계산하면서 구상한다”고 대답했다. 내가 번역한 ‘내 이름은 빨강’이 한국에서 좋은 반응을 보여 정말 고맙다고도 했다.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그가 2002년 발표한 소설 ‘눈’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다. 당시 나는 그 작품 번역에 착수했다. 그는 이 소설에서 터키 정치사의 예민한 부분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신변 위협을 받고 있다고 했다. 한때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는 말을 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이 눈에 선하다. 이 책은 곧 우리나라에도 번역될 것이다.

그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쓴다며 양해를 구하고는 밤 11시쯤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나는 우연히 새벽에 잠이 깨 거실로 나서다가 그의 집필실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것을 봤다.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 긁적이고 있는 키 큰 파묵의 구부정한 등이 보였다. 이른 아침부터 집필에 혼신을 다하는 거장의 뒷모습에 진한 감동이 밀려왔다. 언젠가 파묵이 “남은 생애를 수도승처럼 방 한구석에서 보낼 수 있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의 배려는 세심했고, 대접은 융숭했다. 그의 여름 집필실을 떠나 부두로 가는 길에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내 딸 뤼야와 소설”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혼했지만 딸만은 끔찍이 여긴다. 그는 ‘내 이름은 빨강’을 딸에게 헌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말은 딸과 함께 보낸다”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는 유럽을 여행 중이다. ‘눈’이 영어 외에 다른 언어로 번역되면서 몰려드는 인터뷰에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이 난 아 한국외국어대 중동연구소 연구교수

○ 오르한 파묵은…

△1952년 터키 이스탄불 출생

△1979년 첫 소설 ‘제브뎃 씨와 아들들’ 밀리엣 신문 공모 당선

△1984년 ‘고요한 집’으로 마다랄르 소설상 수상. 프랑스 ‘유럽 발견상’ 수상

△1985년 ‘하얀 성’ 발표. 이 소설로 국제적 명성 얻게 됨

△1985∼88년 미국 컬럼비아대 방문교수

△1994년 소설 ‘새로운 인생’ 발표

△1998년 소설 ‘내 이름은 빨강’ 발표. 프랑스 ‘최우수 외국문학상’, 이탈리아 ‘그린차네 카보우르 상’과 아일랜드의 ‘인터내셔널 임팩 더블린 문학상’ 수상

△2002년 소설 ‘눈’ 발표

△2005년 소설 ‘순수 박물관’ 집필 중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