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85주년 동아의 정신을 말한다

  • 입력 2004년 12월 31일 17시 12분


올해로 창간 85주년을 맞는 동아일보가 창간 이후 지금까지 줄곧 추구해 온 이념과 가치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오늘날 우리 사회 발전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 민족 민주 문화주의 지금도 빛나

첫째, 동아는 민족과 민족주의 이념을 추구했다. 우선 한국 민족이 발전해 독립을 쟁취하려면 동아시아를 무대로 삼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동아’란 명칭이 채택되었다. 1920년 창간 당시의 3대 정신인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는 오히려 지금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에 배일(排日) 신문으로 알려져 독립운동에 관한 사건은 크건 작건 간에 대서특필해 보도했으며, 일본 통치의 악정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조선의 독립을 거의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격렬한 지면을 구성해 총독부와 자주 정면충돌했다.

둘째, 동아는 국제정세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지녔다. 1926년 3월 5일 소련의 국제농민회 본부로부터 온 서신을 게재한 것이 동아 2차 정간의 직접적 이유였다. 하지만 그 전초는 동아가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이관용을 파견하고, 1925년 주필 송진우가 하와이에서 개최된 태평양대회를 방문한 뒤 이에 관한 연재사설 ‘세계대세와 조선의 장래’를 게재한 일에서 비롯됐다. 총독부는 당시 동아가 민족문제를 제창해 독립사상을 보급선전하는 경향이 있다고 간주해 오던 중, 3월 5일자에 독립소요의 찬미격려를 암시한 소련으로부터의 전문을 게재했다는 빌미를 잡아 발행정지 처분에 들어간 것이다.

○ 창간초부터 사회개혁 주도

셋째, 동아는 사회개혁과 발전을 중시하는 개혁주의를 추구했다. 그 대표적 사례는 1920년 5월 ‘가짜 명나라 사람 머리에 몽둥이질(假明人 頭上에 一棒)’이라는 개혁적, 우상 타파적 사설을 게재한 사건이었다. 이 사설의 유림과 유교에 대한 비판 논조 때문에 유림과 보수층은 전국적 동아 불매운동의 조짐까지 보였고 총독부에 압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창간 초부터 수년간 동아가 강력하게 추진한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이라는 양대 문화민족주의운동도 사회개혁과 발전을 꾀한 개혁운동이었다.

넷째, 동아는 광복 이후에도 독립과 국가 건설을 중시했다.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회의의 신탁통치안 발표로 나라가 떠들썩해졌을 때인 1945년 12월 30일자 사설 ‘와전(瓦全)보다 옥쇄(玉碎)로’에서 “도대체 탁치의 주창자는 어느 나라의 누구냐? 어느 나라가 우리에게 불공대천할 이 치명적 모욕을 던지려 했느냐”라고 일갈했다. 동아는 ‘와전보다는 옥쇄’라는 극명한 표현(즉 옥이 못돼 기와로 안전하게 남느니 차라리 옥으로 부서지는 것이 낫다는 뜻)으로 해방정국의 독립 노력에 그 어떠한 장애나 지체도 용납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동아는 또한 단독정부 수립에 관한 찬반이 무성할 때 군정을 철폐하고 대외적으로 발언권을 갖는 독립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며 이를 위해 유엔 결의에 따른 총선거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주장했다.

○ 권력비판 기능 끊임없이 수행

다섯째, 동아는 권력에 대한 감시라는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려 노력했다. 광복 후 역대 정권은 분단과 전쟁, 그리고 산업화를 이유로 들어 강력한 대언론 규제정책을 폈다. 역대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동아는 권력을 비판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 유신권위주의 체제 등장에 따른 국내외 인권탄압 사례가 증가했던 1974년 10월부터 동아는 편집국장 연행에 대한 항의농성을 계기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채택했다. 반유신운동의 선봉에 나선 이 사건으로 한국 언론사상 초유의 ‘광고탄압 사태’가 발생했다. 동아에 게재하기로 계약한 광고주들이 정부의 탄압으로 광고 게재를 취소하거나 광고비를 지불하지 않는 일련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유신정권과의 갈등 과정에서 결국 100명이 넘는 기자들이 회사를 떠나게 됐다. 이후 해직기자들은 재야세력과 연대해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뉴라이트’화합의 비전 제시

마지막으로, 동아는 개인과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 가치관을 추구해 왔다. 민주화 이후 1990년대에 들어와 몇 차례 국가적 위기를 맞은 한국의 민주화 정권들이 지그재그 행보를 계속했다. 그 사이 국정은 점차 진보세력 대 보수세력으로 양극화되었고 다시금 광복 직후의 좌우대립 분열상황으로 회귀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시점에 동아는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에 기초한 자유주의 정신의 ‘뉴 라이트’ 운동을 발굴해내 다시 화합과 통합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올해 우리 모두가 다시 찾아야 할 소중한 자산이 바로 연면히 이어져온 자유주의 정신과 그 가치관이라고 생각된다.

김용직<성신여대 교수·정치학>

△서울 출생(1959년)

△서울대 외교학과 동 대학원 졸업 (1979∼1985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 정치학 박사 (1992년)

△한국정치학회 이사

△현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저서 ‘한국근현대정치론’, 논문 ‘사회운동으로 본 3·1운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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