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START]원로 종교인 대담…옥한흠 목사-설정스님

  • 입력 2004년 12월 31일 16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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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우리 사회는 대통령 탄핵,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위헌 결정, 열린우리당의 4대 입법안 추진 논란, 이라크전 파병 등을 둘러싸고 심한 분열과 갈등을 겪었다. 정치권에서 촉발된 이념 논쟁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돼 상대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 풍토가 더욱 심해졌다. 통합과 화합을 향해 새로이 출발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마음을 헤집어 놓은 이 깊은 골을 하루빨리 메워야 한다.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 널리 존경받고 있는 개신교계의 옥한흠(玉漢欽·66·서울 ‘사랑의 교회’ 원로목사) 목사와 불교계의 설정(雪靖·62·충남 예산군 수덕사 수좌) 스님의 대담을 통해 화해와 통합의 길을 찾아본다. 대담은 지난해 12월 22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의 한 전통찻집에서 90여 분간 진행됐다.》

● 참여정부 2년은 갈등 노출의 시기

▽옥한흠 목사=우리는 광복 이후 짧은 기간에 압축성장을 해 산업화와 민주화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가치관, 사상, 사고방식 등 내면의 세계가 함께 자라지 못하다 보니 손안에 들어온 현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자기와 다르다고 생각하거나 자기를 비판하는 세력을 무조건 적으로 보는 극단적 세태가 생겼습니다.

▽설정 스님=인간의 근본 마음인 지성(智性) 덕성(德性) 용성(勇性)의 삼덕(三德)은 만고에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급속도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진짜와 가짜, 진리와 거짓을 가릴 줄 아는 지성이 모자랐고, 남을 배려하는 덕성이 부족해 이기심이 팽배해졌습니다. 또 기회주의와 한탕주의가 만연했어요. 이처럼 삼덕이 부족한 사람들이 시대를 풍미하고 성실한 사람들은 대접 받지 못한 것이 지금의 분열과 갈등의 원인이 아닌가 합니다.

지난해 12월 22일 오후 서울 성북구 성북동의 한 전통찻집에서 옥한흠 목사(왼쪽)와 설정 스님이 만나 새해 화합과 통합에 대한 덕담을 나눴다. 박영대 기자

▽옥한흠=깊어진 골을 빨리 메워야 한다는 조급함보다는 느긋하게 인내하는 자세로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상처가 치유되지 않을까요. 이런 면에서 참여정부의 지난 2년은 오히려 좋은 기회였죠. 그간 노출된 갈등을 통해 우리는 산업화 시대의 피해자가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입었는지 알게 됐고, 이른바 민주화 세력은 기득권층이 얼마나 굳어 있는 집단인지 알게 됐어요. 이런 관점에서 우파든, 좌파든 둘 다 급작스러운 성장의 피해자라는 의식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요. 따라서 서로 공감하고 동정하면서 상대가 왜 그랬을까 이해하려는 마음이 조금씩 생기면 극과 극의 골은 메워질 것입니다.

● “깃발 들면 따라온다” 생각 버려야

▽설정=우리 사회의 깊은 골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갈등에서 비롯된 측면도 큽니다. 기득권층에 부족한 것은 ‘선(善) 의지’입니다. 부에도 청부(淸富)와 탁부(濁富)가 있는데 좋지 않은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일수록 이기주의가 강해요. 가진 자들의 끝없는 욕심은 못 가진 자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증오심을 유발합니다. 있는 자들은 스스로 자기 주머니를 끌러야 하고 국가는 제도적으로 가진 자들이 베풀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줘야 합니다.

▽옥한흠=공감합니다. 우리가 겪는 진통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가진 자가 나누지 않는다는 겁니다. 참여정부가 분배정책을 펴면서 기득권층이 이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공론화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우리나라는 못 가진 자가 상대적 박탈감을 더 느끼도록 만드는 사회구조라는 것이 문제지요. 대통령이 서두르지 말고 국민의 지지를 받으면서 정책을 펴 나간다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것입니다. ‘깃발만 들면 따라오겠지’ 한다면 가진 자들은 가진 자대로 더 반발합니다. 세계 역사를 볼 때 국가가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분배하는 정책은 실패로 끝났어요. 따라서 대통령과 정부가 국민이 서로 이웃을 생각하고 아끼며 위해 줄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이를 위해 대통령은 사회 지도층과 종교계 지도자들을 만나 최선의 길을 찾아 쉬운 것부터 차근차근 정책에 옮겨 줬으면 해요. ▽설정=인생은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누구나 행복하고 보람 있고 정의롭게 살고자 하지요.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바람직한 가치관이 정립돼야 합니다. 바른 가치관은 좋은 성격에서 나옵니다. 사고가 행동을, 행동이 습관을, 습관이 성격을, 그리고 성격이 인간의 행불행(幸不幸)을 좌우합니다. ▽옥한흠=자기중심적 삶은 정상적 삶이 될 수 없는데도 우리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남을 위하고 사랑하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인간의 진짜 모습인데 이것이 갈수록 희박해집니다. 속된 말로 돈맛을 알게 되면서 인생의 목표에서 이탈한 것이지요. 이건 종교가 책임져야 할 일이지만 오늘날 종교는 감화력을 잃어버렸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못 주고 있어요.

▽설정=종교인들이 자기가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 채, 기득권에 집착해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자기모순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아요. 종교인 스스로 반성하고 사회적 역할을 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 갈등 풀고 화해 주도할 사람은 대통령

▽옥한흠=우리나라의 가장 불행한 변수는 북한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이라는 변수 때문에 우리 사이에서 서로 이해와 사고방식이 엇갈립니다. 인재와 저력, 단결력도 있고 수백만 해외 거주자의 잠재력도 풍부한 우리가 북한문제에서는 제동이 걸립니다.

▽설정=남북문제를 생각하면 가슴부터 답답합니다. 좌우 갈등은 이미 광복 직후 경험했지요. 세계 각국은 어떻게 하면 자국민을 잘 먹이고 편안케 할 수 있느냐를 두고 고민하는데 우리는 시대착오적인 이념 논쟁으로 국력을 낭비합니다. 동족끼리 서로를 죽인 과거의 우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남북문제에 지혜롭게 대처해야지요.

▽옥한흠=북한문제는 세대간 갈등과도 연관돼 있습니다. 산업화 세대는 짚신 신고 다니다 자가용 타고 다니는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또 민주화 세대 덕분에 더 이상 독재 밑에서 괴로움 받지 않고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서로의 공로를 인정하고 포용해야 하는데 북한 이야기만 나오면 표정이 바뀌지요. 나는 민주화 세대는 솔직하게 ‘한때 가슴에 한이 맺혀 탈선한 적도 있었다’고 고백하고, 산업화 세대는 ‘편하게 사는 데만 빠져서 민주화니 뭐니 겁이 나서 투쟁하지 못한 것을 용서해 달라’고 사과한다면 북한에 대한 시각차도 조금씩 줄일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갈등을 풀고 화해 무드를 주도할 사람은 바로 대통령입니다. 지난 2년처럼 민주화 세대만 두둔하지 말고 산업화 세대도 격려해야 합니다. 대통령이 두 세대를 모두 껴안는 넓은 품을 가진다면 분위기가 달라질 겁니다. 대통령이 남은 3년 동안 국민에게 작은 희망의 등불이라도 보여 준다면 지금의 얽히고설킨 문제들이 잘 해결될 것으로 믿습니다.

● 새해에는 역사 과오 되풀이 말아야

▽설정=아무리 지식과 능력이 뛰어나도 심성이 맑고 깨끗하지 않으면 자신과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없습니다. 부국은 땅덩어리와 돈과 군사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른 가치관과 사명감, 책임감을 지닌 인재의 양성에서 이뤄집니다.

▽옥한흠=새해를 맞으면서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필요합니다. 국민 모두 자기 책임을 깊이 통감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함께 고민한다면 새로운 길이 열릴 것입니다.

정리=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옥한흠 목사는▼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8년 ‘사랑의 교회’를 세운 뒤 20여 년 만에 신도 5만 명의 큰 교회로 키웠다. 임기가 5년 남았지만 2003년 오정현 목사에게 담임목사직을 넘겨 ‘세습’ 논란이 일던 개신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국제제자훈련원장과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 등을 맡고 있다.

▼설정 스님은▼

1955년 수덕사에서 원담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범어사 선방 등에서 수행하고 충남 예산군 수덕사 주지와 대한불교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을 지냈다. 30대에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원예학과를 졸업했다. 1998년 종회 의장에서 물러난 뒤 수행에 전념하면서 후학들에게 불경과 조사어록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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