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하울의 움직이는 ‘性’

  • 입력 2004년 12월 29일 17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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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저주로 하루아침에 18세 소녀에서 90세 할머니가 된 소피와 ‘꽃미남’ 마법사 하울의 러브 스토리를 담은 일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城)’. 아무리 ‘사랑은 느낌’이라지만 90세 노파와 ‘꽃미남’ 마법사의 결합은 선뜻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알고 보니, 두 남녀는 21세기 첨단시대에 보석처럼 빛나는 찰떡궁합이었으니! 그들은 전통적인 남녀간 성(性) 영역이 무너지고 이성(異性)의 장점을 추구하는 남녀가 늘어감에 따라 등장한 ‘양성(兩性)형’ 인간, 즉 ‘미즈 스트롱(Ms. Strong·강한 여성)’과 ‘미스터 뷰티(Mr. Beauty·예쁜 남성)’의 전형이었던 것이다(동아일보 27일자 1면 참조). 소피와 하울이 천생배필인 이유를 밝혔다.

○ 소피는 ‘Ms. Strong’

노파가 돼 버린 소피가 직면하는 정신적 쇼크는 갑작스레 ‘암 말기’ 선고를 받은 것에 견주어질 수 있다. 그러나 소피는 스트레스에 대해 ‘부정(그럴 리 없어)→분노(왜 나만 이래야 해)→우울(차라리 죽고 싶어)→수용(이걸 받아들이자)’의 일반적 반응단계를 밟지 않고 ‘수용’ 단계로 직행한다. 화내거나 좌절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나이 들어 좋은 건 놀랄 게 없다는 거구나” 하며 노인의 긍정적 측면을 살핀다. 마법사 하울의 성에 용감하게 혈혈단신 들어가 주인 행세를 하며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며 어둡던 분위기를 발랄하게 바꾼다(사진○1). 또 실의에 빠진 하울을 다독거리고, 겁 많은 그를 대신해 왕궁을 직접 찾아가 ‘전쟁을 그만둘 것’을 주장한다. 사랑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키스 공세를 퍼붓는 적극적 애정관까지 겸비했다.

○ 하울은 ‘Mr. Beauty’


머리 염색이 잘못 나왔다며 “아름답지 못하면 살 의미가 없다”고 좌절하는 그는 외모 지상주의에다 히스테리 증세를 보인다. 마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줄 형형색색의 부적을 산더미처럼 모아 놓고 그 속에서만 비로소 편히 잠든다. 상처받은 자신을 소피가 돌봐 주길 바라는(사진○2) 그의 정신상태는 어른이 되기를 두려워하는 ‘피터팬 신드롬’에 해당된다. 반면 밤이면 새가 되어 뚝뚝 떨어지는 폭탄을 몸소 받아내는 용감한 ‘반전주의자’의 모습도 갖고 있어 그의 아이덴티티는 종잡기 힘들다. 하울이 마법을 부려 소피를 위한 개인 작업실을 만들어 주는 것도 알고 보면 ‘깜짝 선물’이 아니라 소피가 스스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터전(직장)을 마련해 준 셈이다.

○ ‘움직이는 성’은 완벽한 중산층 가정


현실의 온갖 거친 문제를 도맡는 소피와 우아하게 날아다니며 꿈을 좇는 하울은 남녀 역할이 역전된 21세기형 선진 커플. 이들은 움직이는 성 안에서 일종의 ‘의사(擬似)가족’을 이루는데 △하울의 꼬마 제자 마르클은 ‘아들’을 △마법의 능력을 잃고 소피와 하울에게 얹혀사는 늙은 마녀는 ‘부모’를 △천식에 시달리는 강아지 ‘힌’은 애완동물인 셈이다. 완벽한 중산층 가정의 메타포(사진○3)가 아닐 수 없다.

○ 하지만 행복할까?

영화에선 소피와 하울이 사랑을 이루는 것으로 끝을 맺지만, 그들의 부부생활(?)은 난관에 부닥칠 것으로 예측된다. 소피와 하울 커플은 시작부터 대등한 파트너십이 아니라 힘의 균형이 깨진 ‘모자(母子) 관계’에 가깝기 때문. 밤마다 새가 돼 날아다니는(사진○4) 하울의 역마살은 전쟁이 끝나더라도 그를 운명처럼 따라다닐 것이며, 결국 하울은 가정에 충실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하울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챙기는 소피의 존재를 점차 귀찮게 느끼면서 ‘해방’을 갈망할 공산이 크다. 하울이 소피를 이성이 아닌 모성(母性)으로 여기는 데서 오는 심인성 발기부전도 예상된다.

(도움말=양창순 대인관계연구소 소장·정신과 전문의)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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