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아크로폴리스]<12>삶의 변화를 통해 본 한국현대사

  • 입력 2004년 3월 24일 18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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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대사는 광복, 6·25전쟁과 함께 시작됐다. 혼란스러웠던 그 시대에 비하면 현재 우리 사회는 놀라운 물질적 성장과 제도적 안정을 이뤘다. 하지만 격동기의 삶은 오늘날까지 한국인의 문화를 형성하는 데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상인 한림대 교수(46·사회학)가 1945년 8월에 태어난 ‘해방둥이’ 마종헌씨(59·서울 마포구 도화동), 장차 한국사회를 이끌어갈 신세대인 이지윤씨(23·고려대 교육학과 4년)와 양종협군(16·서울 여의도고 1년)을 만나 보통사람들의 구체적 생활을 돌아보며 한국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가난 극복의 시대

△전상인 교수=1945년부터 50년대까지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역사적 원점 혹은 원형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시 신탁통치를 두고 ‘찬탁 반탁’의 갈등이 격렬했다면, 지금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두고 이른바 ‘찬탄 반탄’으로 나뉘어 있지요. 그런데 한 시대의 생생한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특별한 사람이나 엘리트가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일상에서 겪었던 생활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어요. 양종협군과 이지윤씨는 혹 배고픔을 경험해 본 적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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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종협군=없습니다.

△이지윤씨=저도 마찬가지예요.

△마종헌씨=전 배고픔이 뭔지를 처절하게 경험했어요. 6·25전쟁 당시 군인들이 쌀을 다 가져가버려 밥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어요. 뒷산에서 질경이를 캐와 몇 달간 죽을 끓여 먹었는데 나중에는 지쳐서 기운이 하나도 없더군요.

△전 교수=광복이 되자 해외로 나갔던 사람들이 조국으로 돌아오고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도 많아 인구가 급격히 늘었어요. 하지만 식량정책을 잘못 세운 까닭에 겨울에는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지요. 이렇게 지독한 가난을 경험했기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 아주 강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처럼 단기일 내에 의식주 문제를 해결한 것은 기적에 가깝습니다.

△이=2차 세계대전 뒤 찢어지는 가난을 경험했던 독일인은 부유해진 이후에도 근검절약 습관을 유지한데 비해, 한국인은 자신이 겪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며 자식들이 오직 풍요로움을 누리도록 하는 데만 주력한 것 같아요.

#이념 대립과 세대 갈등

△전 교수=광복과 6·25전쟁 당시 겪었던 이념 갈등과 혼란을 돌아보면 지난 60년간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광복 후 첫 3·1절 기념식을 우익은 보신각에서, 좌익은 남산에서 따로 열었습니다. 광복절 기념식마저도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좌우익이 함께 하지 못했지요. 남북한 통일을 기원하며 부르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는 사실 당시 대립해 있던 좌우익이 서로 통일해 보자는 의미로 만들어진 겁니다. 이런 진보와 보수는 세대간 대립으로도 드러나지요.

△양=기성세대는 모든 걸 자신들의 기준으로만 판단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신세대의 관점을 이해하려는 마음도 가져줬으면 해요.

△마=나도 어릴 때는 기성세대를 많이 원망했어요. 전쟁을 겪으며 피란 다니느라 공부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중학교 입학 후에는 도대체 어른들이 어떻게 했기에 일본에 지배당하고 나라가 반쪽이 됐나 하는 원망을 많이 했죠. 지금 젊은이들도 젊은 시절의 나와 비슷한 것 같아요. 하지만 이만큼 나라를 이끌어온 것 역시 기성세대라는 점을 부인해서는 안 될 겁니다.

△이=2002년 월드컵 때는 한국인이란 것이 정말 자랑스러웠는데 그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든 분들이 기성세대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어른들은 우리에게 세상일에는 신경 쓰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해 놓고는 갑자기 어느 날 “우리가 너희들에게 어떻게 해 줬는데” 하며 섭섭해 하세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 교수=격동기에 어렵게 고생한 세대가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못 받는 이유는 베풀지 않는데 있을 겁니다. 베풀지 않으니 빼앗기는 상황에 이른 거죠.

△양=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심각한 격차를 극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에서 가진 자들은 베푸는 면에서 너무 인색한 것 같습니다. 가진 자가 베풀 때 사회통합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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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힘

△전 교수=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면 6·25전쟁 당시의 생활상이 잘 나타나 있어요. 형 진태는 자신을 희생해가며 동생의 공부를 뒷바라지하는데, 이는 엄청난 혼란을 겪는 와중에서도 한국인들이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일찍 눈 떴다는 것을 말해 줘요. 공부하라는 부모님들의 잔소리가 결국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됐고, 4·19혁명과 6·29선언을 이끌어내며 민주화를 이룬 뿌리가 됐습니다.

△이=그런데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형 진태는 동생을 위해 다른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등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립니다. 우리 사회가 엘리트를 키워내는 과정도 이와 비슷해요. 엘리트들이 이렇게 길러졌기 때문에 결국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양=현대사 교육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한국현대사에 대해 배운 것은 거의 없어요. 삼한시대 제사장 이름은 다 외워야 하지만 광복 이후의 역사는 사건 목록만 대강 훑고 지나가는 게 오늘날 학교 교육의 현실입니다.

△전 교수=한국현대사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보수와 진보의 시각이 달라 한국현대사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기피 분야가 되고 있지요. 하지만 지배 계층의 역사가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생활과 삶을 들여다보면 견해 차이를 넘어 그 속에서 역사적 교훈을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정리=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읽어 볼 만한 책▼

#책

▽고개 숙인 수정주의(전상인·전통과 현대)=한국현대사 연구에서 브루스 커밍스로 대표되는 수정주의적 시각에 대한 비판적 극복을 시도한 연구서.

▽역사 앞에서(김성칠·창작과 비평사)=6·25전쟁 당시 서울대 사학과 교수였던 저자가 미처 피란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으면서 지켜본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박완서·웅진닷컴)=정감 어린 시골에서 보냈던 유년시절부터 6·25전쟁, 1·4후퇴까지 작가의 체험을 담은 자전적 성장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박완서·웅진닷컴)=작가가 스무 살 무렵 겪었던 6·25전쟁의 체험을 그린 자전적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의 후편 격.

▽인류학자의 과거 여행:한 빨갱이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윤택림·역사비평사)=항일운동과 좌익운동이 활발했던 충남 예산군 시양리 주민들의 삶을 통해 바라본 6·25전쟁.

▼볼 만한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감독 박광수)=작가 임철우씨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6·25전쟁의 고통 속에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민초들의 끈질긴 생명력.

▽아름다운 시절(감독 이광모)=6·25전쟁 당시 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아이들의 눈에 비친 전쟁을 그린 영화. 보통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삶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

▽태극기 휘날리며(감독 강제규)=6·25전쟁 당시 한 형제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참혹한 실상을 표현.


사람들로 붐비는 서울의 명동 거리를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 전상인 교수, 이지윤, 마종헌씨, 양종협군(왼쪽부터). 전 교수는 “현대사의 가난과 혼란을 짧은 시간에 극복한 것은 기적 같은 일이지만 빈부격차, 이념갈등 등의 문제는 여전히 우리가 극복해야 할 삶의 문제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박영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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