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아내는 유학중…"앞날 위해 투자" 장기외유로 별거부부

  • 입력 2003년 6월 26일 17시 22분


코멘트
21년간의 유학 생활 후 도예 작가로 변신한 최미현씨가 작업실로 쓰고 있는 서울 마포의 한 단독주택 담벼락을 배경으로 앉아 있다. 담벼락 밑에는 초벌구이에서 깨져 나온 도자기 파편들이 널려 있다. 이 공방은 최씨의 외아들에게는 놀이터이자 공부방이다.   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21년간의 유학 생활 후 도예 작가로 변신한 최미현씨가 작업실로 쓰고 있는 서울 마포의 한 단독주택 담벼락을 배경으로 앉아 있다. 담벼락 밑에는 초벌구이에서 깨져 나온 도자기 파편들이 널려 있다. 이 공방은 최씨의 외아들에게는 놀이터이자 공부방이다. 신석교기자 tjrry@donga.com
서울의 모 대학 A 교수(40)는 이번 주말 미국행 비행기를 탄다.

미국 미주리대에서 유학 중인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아내는 95년 이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2년 안에 석사 과정만 마치고 오겠노라던 아내의 유학 생활은 박사 과정으로 이어졌다. 이 바람에 남편과 아내는 올해로 9년째 의도적인 별거 생활을 하고 있다.

A 교수의 주위에는 방학을 이용해 유학 중인 아내를 만나러 가는 동료 교수들이 여럿 있다.

“아내가 재능을 발휘하고 살려면 외국 학위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떨어져 사는 것은 싫지만 아내의 꿈을 꺾을 수는 없잖습니까.”

●살아야 할 시간이 더 길다

정보기술(IT) 컨설턴트인 B 과장(35)의 아내도 유학 중이다. B 과장은 최근 미국 출장길에 올랐고 돌아오는 길에 여름휴가를 내 아내가 피아노연주를 공부하고 있는 독일에 들러 올 참이다.

“지난해 3월 결혼하고 올 1월 아내가 독일로 떠났습니다. 제 나이가 많아 서둘러 아이를 갖고 싶었지만 먼 장래를 내다보고 각자 공부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지요. 저도 이곳에서 주말을 이용해 대학원에 다닙니다. 3년 반에서 5년 정도 떨어져 살 각오입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투자를 해놓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김성미 수원여대 외래교수(36·제과제빵과)는 결혼 4년째 되던 해인 1999년 6월 영국 런던 르 코르동 블루로 유학을 감행했다. 김 교수는 결혼 전 기업체의 일본어 강사로 일했지만 아이가 생긴 뒤로는 전업주부로 집에만 머물렀다. 그러다 97년 말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맞았다.

“회사원인 남편만 바라보고 살 수 없다는 긴장감이 들더군요. 일본어 강사로 일할 수도 있었지만 쟁쟁한 강사들이 많은 데다 나이가 들어서까지 하기는 어려웠어요. 뭔가 장기적인 경제 대책을 세워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김 교수는 결혼 전 일본 유학과 런던에서의 어학연수 시절 그곳에서 케이크와 초콜릿 전문점이 성업 중인 것을 보았던 기억을 떠올리고 1년간 제과 학원에 다니며 관련 자격증을 땄다. 하지만 국내에는 초콜릿 만드는 법을 배울 곳이 없었다.

남편과 세살 배기 딸아이는 시댁에 맡기고 학비는 친정 도움을 받았다. 생활비는 남편이 월급과 아파트 전세금을 빼낸 목돈에서 마련해 보내 주었다.

1년 반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2001년 1월 귀국한 김 교수는 초콜릿 공예 개인전을 갖고 대학과 학원에서 초콜릿 제조 강의를 한다. 최근에는 서울 서초구 잠원동에 공방을 마련해 16주 과정의 초콜릿 제조 강좌도 열었다. 뜻이 맞는 제자들이 생기면 함께 초콜릿 전문점을 차려볼 계획이다.

“친구들이 ‘유학가지 말고 그 돈으로 아파트나 사두지 그랬느냐’고 해요. 하지만 꿈을 팔아 구입한 아파트가 값이 올랐다고 행복하기만 했을까요. 영국의 초콜릿 협회장은 나이가 칠순입니다. 초콜릿은 나이가 들수록 깊은 맛을 낼 수 있지요. 마흔이 되기 전에 투자해 칠순 넘어서까지 일할 수 있다면 그게 더 낫지 않을까요.”

●공부하는 엄마와 아이

김 교수는 공부를 빨리 끝내고 오기 위해 아이를 떼놓고 런던으로 갔다. 외지에서 생존해야 했기 때문에 집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또 남편과 아이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자기만을 위해 쓰니 행복했다고 했다.

“애 딸린 주부가 돈 들여 유학을 하려면 이기적이지 않으면 안 돼요. 남편 아이 시댁 친정 부모 모두 배려했더라면 갈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외동딸(7) 이야기를 꺼내자 김 교수는 “아이가 지금은 괜찮지만 커서라도 정서적인 결함을 보일까봐 마음이 아프다”며 눈가의 물기를 훔쳤다.

엄마 품에서 자라던 아이는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사라지자 한동안 넋이 빠진 것처럼 늘어져 있었다고 했다. 엄마가 귀국하자 아이는 ‘껌처럼’ 엄마 곁에 들러붙어 다녔다. 잘 때는 엄마의 머리카락을 꼭 잡고 잤고 엄마가 화장실에 갈 때도 안겨 떨어지지 않았다.

도예 작가 최미현씨(35)도 다섯 살 배기 아이를 떼놓고 유학을 다녀왔다. 대학에서 가정학을 전공한 최씨는 10년간의 회사원 생활을 접고 2000년 8월 미국 로체스터대로 건너가 MFA(Master of Fine Arts) 과정을 밟았다. ‘회사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아이도 내 손으로 키우자’는 생각에서 평소 취미로 만들던 도자기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미국 생활에 적응하는 대로 아이를 데려갈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오전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도자기 만들고 굽느라 도저히 여유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혼자서 빨리 공부를 끝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지요. MFA의 이수 학점은 100학점으로 대개는 학위를 받는 데 3년이 걸려요. 저는 상황이 절박했기 때문에 2년 만에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최씨의 아들은 어려서부터 친할머니 손에서 컸기 때문에 김 교수의 딸처럼 엄마의 부재로 커다란 정서적 불안을 겪지는 않았다. 최씨가 계획했던 대로 현재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는 학교가 끝나면 집 근처에 있는 최씨의 공방에 가서 같이 밥도 먹고 엄마가 도자기를 만드는 동안 옆에서 숙제도 하며 엄마와 함께 지낸다.

“제가 개인적으로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나니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미안한 마음도 있어 아이나 남편에게도 잘하게 돼요. 엄마가 행복해야 가정이 편안해지는 것 아닐까요.”

●공부하는 아내, 그리고 남편

김 교수는 유학을 결정하기 전 점을 보았다. 떨어져 지내다 부부 사이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불안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5월 남매를 데리고 영국으로 건너가 맨체스터대에서 영어교수법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박양선씨(38)는 “불안했다면 아예 유학을 떠날 생각도 않았을 것”이라며 “서로 신뢰하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나 유학 중인 아내와 9년째 떨어져 지내는 A 교수는 유학 상담을 의뢰하는 여학생들에게 “절대 결혼하지 말고 혼자 가라”고 조언한다.

A 교수에 따르면 유학 중인 주부는 한국 사회에서 기혼 여성이 감당해야 할 모든 의무에서 벗어나 있고 공부를 하며 성취감을 느끼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 반면 남편들은 별거로 인해 심한 스트레스를 받다가 건강을 잃거나 혹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다 일탈하게 된다는 것.

“여자들은 미국에 체류하는 기간이 길수록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특히 함께 간 자녀가 초등학교 3학년이 넘으면 한국 학교에 적응하기 힘들어져 아이 때문에라도 귀국이 힘들게 되지요. 이 경우 남편은 그야말로 학비 생활비 보내주며 헌신적으로 뒷바라지를 하게 됩니다. 아내는 점차 미국적 사고방식에 익숙해지는 반면 남편은 헌신하는 만큼 보상심리가 강해져 가부장적 권위를 내세우게 됩니다. 이 때문에 영원히 갈라서는 부부들도 생겨나는 것이지요.”

아내를 미국으로 유학 보낸 뒤 3년 반 동안 외아들을 키우며 아내 뒷바라지를 했던 서울 K대 C 교수는 “떨어져 지내는 가족도 다양한 가족 형태의 하나라고 인정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C 교수의 아내는 유학 중 안식년을 맞아 아들을 데리고 미국에 합류한 남편과 모여 살면서 마음이 약해져 중도에 유학을 포기했다. “가족끼리 떨어져 살면서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다”고 했다. 지금은 미국 대학에 진학한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다시 남편만 서울에 남겨두고 미국에 가 있다.

C 교수는 스트레스 극복 방법으로 두 가지를 조언한다.

하나는 경제적 부담이 되더라도 원룸 아파트로 옮기지 말고 아내와 함께 살던 집에서 그대로 생활하라는 것. C 교수는 아내와 아들이 없는 50평대 아파트에서 혼자 생활한다. 아내가 쓰던 물건, 아들이 보던 책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외롭다는 느낌을 덜 받는다.

또 일기를 쓰듯 아내에게 e메일을 보내거나 편지를 하는 것이다. 오늘은 아침에 무엇을 해먹었고 운동은 했는지, 누구와 만나 무슨 얘기를 했는지 등 사소한 것까지 일기 쓰듯 메일을 쓰다 보면 거짓말하기가 힘들게 되고 거짓말을 해야 할 행동도 자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