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영문소설 펴낸 정종순 금강고려화학 부회장

입력 2003-06-22 17:46수정 2009-09-29 00:18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정종순 금강고려화학 부회장이 소설 ‘순이-격랑 위의 여행자’를 앞에 놓고 활짝 웃고 있다.-김미옥기자
금강고려화학 정종순(鄭鍾淳·60) 부회장이 최근 ‘순이-격랑 위의 여행자(Soony-A Traveler on the Angry Wave)’라는 500여쪽의 영문소설을 발간했다.

이 소설은 일제강점기인 1941년부터 사할린 상공에서 대한항공 007기가 피격되는 1983년까지 40여년의 세월을 헤쳐 온 순이라는 한 한국 여성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순이는 마을의 대갓집 마름에게 겁탈당하고, 일본군 위안부로 팔려 가며, 6·25전쟁 이후에는 양공주로 전락하는 등 한국 현대사의 오욕을 온몸으로 체현하는 인물이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건너가 사업가로 성공한 순이는 다시 코리아게이트에 휘말려 옥살이를 겪게 되며 아기일 때 헤어졌던 아들을 만나기 위해 1983년 고국 행 비행기를 탔다가 공중에서 산화하고 만다.

정 부회장은 “한국인에게는 익숙하지만 외국인에게는 낯설기만 한 한민족의 비극적 현대사를 들려주고 싶었다”고 집필 동기를 밝혔다. 그는 이를 위해 처음부터 영어로 소설을 썼는데 자비로 5000부를 인쇄해 이 중 3000부를 외국 도서관에 기증할 계획이라고 한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부산상고 4년 선배이기도 한 그는 4·19혁명 직후였던 고교시절부터 운동권이었다. 서울대 상대에 진학한 뒤에도 3년 선배인 신영복(申榮福) 성공회대 교수 등과 함께 한일수교 반대 시위를 벌였다. 그러다가 학자금 마련을 위해 베트남전에 자원 입대했고 그 사이 통일혁명당 사건이 발생해 신 교수 등 옛 학우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그가 68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한 것도 베트남전 참전용사라는 ‘알리바이’마저 의심받을까 싶어서였다고 한다. 그는 이후 고려화학과 ㈜금강을 거치면서 근대화의 역군으로 변신했고 그런 그의 삶의 궤적은 1983년 대한항공 007기 피격 사건을 접하면서 한 편의 소설 구상으로 응축된다.

“국가간 관계에서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 얼마나 무력한지, 나라가 힘이 없을 때 개인의 운명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형상화하고 싶었습니다.”

본격적인 집필은 1993년부터 시작했다. 임원이 되면서 틈틈이 남는 시간을 이용해 PC에 소설을 써가기 시작한 것. 98년부터는 강남역 부근에 집필실까지 마련했다. 좋아하던 골프도 접고 주말과 명절 연휴도 집필실에서 보냈다. 초고를 완성한 뒤 퇴고에만 다시 3년을 매달렸다.

해외 유학 한번 다녀온 적 없는 그가 영문소설 쓰기에 도전한 데에는 학창시절부터 헤밍웨이와 존 스타인벡, 시드니 셸던의 작품들을 애독해 온 실력이 바탕이 됐다고 한다.

“우리의 치부를 영어로까지 써서 까발리느냐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생각 자체가 그것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방증이 아닐까요. 오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것을 되풀이해 기록해야 합니다.”

그는 후속 작품을 낼 것이냐는 질문에 “내 자신에 대한 환갑 선물일 뿐”이라고 껄껄 웃으면서 적절한 영어 표현이 떠오르면 자다가도 집필실로 달려간 남편을 이해해 준 아내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주요기사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0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