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단편소설]김나정/비틀즈의 다섯번째 멤버2

  • 입력 2002년 12월 31일 15시 52분


그림 박수룡
그림 박수룡
숙박비는 선불이라고 하자 여자는 지갑을 열어 지폐를 꺼내 소녀에게 건네주었다.

현관방으로 들어간 소녀는 주머니에서 꺼낸 돈과 주민등록증을 스타킹 상자 속에 넣었다. 상자 안에는 모두 세 개의 주민 등록증이 들어있다. 마흔 두 살, 서른 여덟 살, 서른 두 살의 여자들이 여인숙에서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렸다. 살집이 많고 눈썹이 옅은 여자, 쌍꺼풀이 없고 살결이 흰 여자, 두툼한 입술에 붉은 립스틱을 바른 긴 파마머리 여자. 소녀는 다시 한번 스물아홉 살 여자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의 여자는 실제보다 두세 살은 어려 보였다. 소녀는 거울을 번갈아 들여다보며 사진 속의 여자처럼 입을 꾹 악물어 보았다.

저는 1974년 항구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시고 형제자매도 없지요. 하지만 이런 제 처지를 비관하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돌봐주어야 할 아이가 있기 때문이지요. 식당일은 누구보다 잘 할 자신이 있습니다.

취미는 기타입니다. 한때 피아노를 치기도 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었지요.

발가락 사이로 비눗방울이 부풀어 올랐다. 소녀는 물에 젖은 시트를 밟아댔다. 여자의 빠진 머리카락이 한두 가닥씩 엉겨 물 위로 떠올랐다.

“손님은 나 혼자니?”

여자는 개집 앞의 판판한 돌 위에 앉아 소녀를 바라보고 있다. 여자의 발아래에 기타 케이스가 놓여져 있다. 소녀는 치맛자락을 말아 쥐고 다시 빨래를 밟아대기 시작했다. 여자는 그런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주민등록증, 필요하니?”

소녀는 가만히 빨래통 속에 서 있다. 여자는 양말을 벗어 돌 위에 올려놓더니 빨래 통 속으로 들어왔다. 빨래를 밟는 여자의 발등 위로 나무뿌리처럼 굵은 핏줄이 도드라져 보였다. “필요하면 가져.”

몇 명의 사람들이 철책에 몸을 걸치고 갈매기에게 새우깡을 던져주고 있다. 갈매기 몇 마리가 철책 근처를 낮게 날아다녔다. 갈매기는 새우깡이 바다에 떨어지기도 전에 잽싸게 낚아채갔다. 소녀는 바닥에 떨어진 새우깡을 주워들고 바다를 향해 던졌다. 여자는 입을 꼭 다문 채 바다 저편을 바라보았다. 날이 흐려서 바다 건너의 섬은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난간 앞에 앉아 기타 케이스를 열었다. 소녀가 여자 곁에 쪼그리고 앉고, 몇 명의 사람들이 여자 앞에 모여들었다. 여자는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사랑하는 클레멘타인. 늙은 애비 홀로 두고.”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여자의 노래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나고 박수 소리가 들려왔고, 서 있던 여자 한 명이 기타 케이스에 동전을 던져 넣고 남자의 팔을 끼고 사람들 틈을 빠져나갔다. 기타를 치던 여자는 일어나 동전을 주워들고 몰려 선 사람들을 헤치고 나갔다. 돌아온 여자는 동전을 소녀에게 주고 기타 케이스를 덮었다. 몰려 든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소녀는 여자의 뒤를 따라가며 주머니 안의 동전을 만지작거렸다.

밤새 술을 마셨는지 사내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마당에는 그의 친구 몇이 소주병을 들고 서 있다. 사내는 안줏거리를 준비하라고 말한 후 친구들과 1층 끝 방으로 향했다. 현관방 앞에 어제 사내가 메고 나갔던 자루가 놓여 있다. 텅 빈 자루에는 핏자국이 군데군데 나 있다.

부엌으로 들어온 소녀는 냉동실을 열어 동태를 꺼냈다. 누런 종이에 쌓인 동태 두 마리의 몸은 서로 엉겨 붙어 딱딱하게 굳어 있다. 소녀는 한쪽 귀가 떨어져 나간 냄비에 물을 붓고 종이를 대충 뜯어낸 후 동태를 통째로 담가 놓았다. 물 속에서 누런 종이 조각이 수초처럼 흔들거렸다. 소녀는 야채 칸에서 무와 쑥갓을 꺼냈다.

몸이 떨어져 나간 동태의 살은 흐물흐물하고 한번 냉동되었던 눈알은 충혈되어 있다. 식칼로 동태의 몸을 동강내자 나무 도마위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소녀는 식칼을 세워 지느러미를 발라내고, 물 속에 살덩어리를 던져 넣었다.

동태찌개 냄비를 내려놓은 소녀에게 사내의 친구들은 앉아 광이나 팔라고 했다. 쟁반을 든 소녀는 사내 쪽을 바라본다. 주인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손에 들고 있는 화투패만 들여다 보고 있다. 구멍가게 이씨는 제 옆자리를 내주며 “그럼, 그럼 용돈 벌이라도 해야지. 니네 주인 아저씨가 어디 용돈이나 제대로 주겠냐” 능청을 뗀다.

패를 떼던 주인 사내는 카 센터 황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긴 주워다 밥 먹여 주고 재워주는 게 어디야.”

소녀는 냄비에 동태찌개를 담아 이층으로 향했다. 불은 켜져 있었지만 여자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몇 번 더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문 안에서 여자의 울음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지만 뱃고동 소리에 가려 확실하지 않았다. 소녀는 냄비에 든 동태찌개를 들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여자는 자기 이름이 ‘황은경’이라고 했다. 여자는 바다 건너 섬에 부모가 산다고 했다. 여인숙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여자는 소녀에게 비틀즈 이야기를 해주었다.

“비틀즈는 원래 멤버가 다섯 명이었어. 비틀즈가 누구냐고? 영국의 유명한 그룹이야. 정말 모르니?”

여자는 무릎을 두드리며 소녀에게 노래 한 소절을 들려주었다. 승객은 소녀와 여자 밖에 없었다.

“그 다섯 번째 멤버는 비틀즈가 유명해지기 바로 전에 죽었어. 사랑 때문에 죽었다는 말도 있지만 확실히 밝혀진 건 아무 것도 없어. 여하간 중요한 것은 그가 무명으로 자기가 나고 자란 바닷가 도시에서 비참하게 죽었다는 거야.”

방으로 돌아온 소녀는 밥과 동태찌개를 먹으며 TV를 보았다. 화면 속의 벤치에 앉아 있는 여자와 남자의 얼굴이 천천히 포개진다. 천천히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진지하게 그들은 입을 맞추고 있다. 무릎 위에 놓인 여자의 손이 가만히 움직인다.

매주 수요일, 목요일 밤 10시에 하는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이 자기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소녀는 언젠가 그 사실을 눈치 챈 여자가 어떻게 할지가 궁금했다. 남자의 뺨을 때릴까, 치밀하게 계획을 짜 남자에게 복수를 할까. 아니면 기차를 타고 머나먼 곳으로 떠나버릴까. 소녀는 입안에 든 가시를 쟁반에 뱉어 놓았다.

한 사내가 중국에서 오는 보따리 상을 만나러 여객 터미널에 간다. 보따리 상에게 뭔가 받기로 했는데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약속 시간에서 두 시간이 넘도록 상대방은 나타나지 않는다. 누가 버리고 간 스포츠 신문의 낱말 풀이까지 다 채워놓고 사내가 하릴없이 앉아 있는데, 맨발에 거지꼴을 한 여자아이가 사내 쪽으로 다가와 발을 치우라는 몸짓을 한다. (얼굴이 검고 비쩍 마른 여자 아이를 캐스팅해야 할 것이다)

쭈뼛거리던 사내는 엉거주춤 두 다리를 옆으로 거두고, 여자아이는 바닥에 납작 엎드리더니 의자 밑에 손을 넣고 더듬거린다. 몸을 일으킨 여자아이의 손에는 먼지와 머리카락이 묻어 있는 사탕이 쥐어져 있다. 사내는 여자아이가 그 사탕을 막 입에 넣으려는 순간, 무심코 여자아이의 손을 탁 쳐서 사탕을 떨어지게 한다. 여자아이는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를 내며 사내에게 달려들고, 사내가 걸치고 있던 남방에서 단추가 떨어져 나간다. 대합실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여자아이와 사내를 쳐다본다. 당황한 사내는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여인숙까지 끌고 오게 된다.

당황한 사내는 왜 여자 아이의 손을 잡고 여인숙으로 데려오게 되었을까. 소녀는 냄비에 남은 국물을 밥공기에 부었다. 밥알이 붉게 물들었다. 여인숙에는 해야 할 허드렛일이 많다.

소녀는 아랫배를 내려다보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살은 많이 쪘다. 사내는 정말 기분 나쁠 때 외에는 소녀를 때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가끔은 길 건너 슈퍼에서 사온 군것질거리를 줄 때도 있다. 소녀는 텅 빈 밥그릇과 냄비를 구석에 밀어놓고는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벽에 걸린 달력 속의 여자가 소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아이는 내년 봄에 태어날 것이다.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사내의 목소리에 소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소주가 모자란다고 했다. 사내는 담요 밑에 깔린 지폐 한 장 꺼내 소녀에게 내민다. 거스름돈은 가져도 돼. 술에 취한 사내의 눈가는 붉었다.

소녀가 문을 닫자, 방안의 사내 중 한 명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사내가 건네준 만원짜리를 주머니에 넣고, 복도로 나섰다. 붉은 양탄자가 깔린 복도는 어두컴컴했다. 죽은 난 화분이 복도에 줄지어 있다. 복도를 미처 빠져나가기 전에 소녀는 현관 바로 앞에 있는 101호로 끌려 들어갔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문이 닫혔다. 소녀의 입을 틀어막는 남자의 손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남자는 소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엎드리게 한 후 다짜고짜 소녀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방안은 어둡고 간간히 저편 어디선가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피박에 광박이야 씨발.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복도를 가로질러 오고, 소녀가 얼굴을 박고 있는 이불에서 담배 냄새가 났다. 이불의 뻣뻣한 천위에 함부로 문질러지는 소녀의 뺨이 점점 붉어졌다. 남자가 지퍼를 올렸다. 담배 불똥이 튀어 군데군데 타들어 간 자국이 난 이불 위에 엎드려 있다. 침대 옆 탁자에 지폐 몇 장을 놓고는 남자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천장이 낮다. 눈을 감고 뜰 때마다 천장은 점점 소녀 쪽으로 내려앉았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내의 웃음소리도 그 속에 섞여 있다. 소녀는 손을 내밀어 전등 옆에 놓여진 지폐를 그러쥐었다. 구겨진 지폐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감은 소녀의 눈 속으로 새들이 날아다녔다. 잠이 오기 시작했다. 소주는 사다주지 않아도 될 것이다.

새벽녘까지 화투를 치던 사내들은 해장이라도 하러 밖으로 나간 모양이다. 소녀는 방안에 함부로 굴러다니는 소주병을 한데 모아 쟁반 위에 올려놓았다. 쟁반 위에는 동태의 가시가 흩어져 있다. 소녀는 찌개 국물로 붉게 물든 생선 가시를 한데 모아 놓는다. 재떨이는 담배꽁초와 누군가 뱉어놓은 가래침으로 가득 차 있다. 끈끈한 가래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웃음 소리, 벽에 달라붙은 가래 덩어리는 천천히 미끄러져 내리고, 담배꽁초는 소녀의 발 아래 흩어졌다. 장롱에서 스타킹 상자를 꺼낸 소녀는 지폐를 고무줄로 묶어 가방 속에 넣고 여자의 주민등록증을 주머니 속에 밀어 넣었다. 옷 몇 벌을 가방 속에 구겨 넣고 손금고를 여니 안에는 204호 여자가 낸 숙박료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소녀는 가방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문을 두드렸지만 여자는 나오지 않았다. 소녀는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204호 문을 열었다.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탁자 위에는 반쯤 비워진 약병이 넘어져 있고 그 앞에 몇 개의 주홍색 알약이 흩어져 있다.

화장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소녀는 귀를 문에 바짝 대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자는 늦은 목욕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소녀는 화장실 앞에 서서 어제 말한 대로 정말 기타를 가져도 좋으냐고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여자의 대답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침대 위에 놓인 기타 케이스의 뚜껑은 열려 있다. 기타 줄에는 글씨가 씌어진 종이 몇 장이 끼워져 있다. 내용은 길었으나 글자를 모르는 소녀는 일단 종이를 빼내 주머니에 넣고 기타 케이스를 들고 일어섰다.

204호를 나온 소녀는 죽은 난초가 놓인 복도를 지난다. 알루미늄 그릇이 놓인 텅 빈 개집 앞을 지난다. 골목 끝에는 금수장의 노란 입간판이 서 있다. 술 취한 사내의 발길질에 의해 입간판은 반쯤 찌그러져 있다.

아이는 내년 봄에 태어날 것이다. 아이가 자라나 물으면 소녀는 네 아버지는 바다 건너 도시에서 기타를 치던 사람이라고 말해줄 것이다. 우리는 더 없이 사랑했으나 아이들에게는 말해줄 수 없는 비극적인 이유로 헤어지게 되었노라고.

▼당선소감…김나정▼

김나정

“현세에 못 되면 다음 생에서라도 소설가로 환생하지 뭐” 라고 술김에 얘기한 적도 있었지만 앞으로의 생이 막막했다.

파를 다듬다, 아이의 기저귀를 갈다가 한때 문학 소녀였던 여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버텨 가는지 궁금했다.

이미 죽은 내가 문지방에 서서 잠든 남편과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꿈을 꾸었다. 이불 밖으로 나온 남편의 발과 자그마한 아이의 발. 방안은 따뜻하고 아이와 남편은 평화스럽게 잠들어 있다. 내가 없어도 아이는 자라고, 남편은 늙어갈 것이다. 안심되었지만 쓸쓸하였다. 현명한 아내도 좋은 엄마도 그렇다고 다른 무엇도 못 되는 나의 자리는 이 세상에는 없을 것만 같았다.

태몽을 꾸었고 이제 나의 자궁 속으로 아이가 하나 더 들어왔다. 소중히 품어 눈 밝은 아이를 낳고 싶다.

아이 둘 키우기가 만만치 않겠지만 그 아이들과 새롭게 세상의 말을 배워보고 싶다. 그리하여 결코 도통할 수 없고, 쉽게 절망할 수도 없는 엄마로서의 소설을 쓰겠다.

크리스마스 때면 청계천으로 데려가 양껏 책을 고르게 했던 아버지, 나 때문에 맘고생 심했던 어머니, 엄벙덤벙 며느리 대신 진하를 돌봐주신 어머님, 죽음 앞에 겸허해지라는 교훈을 주신 아버님, 끊임없이 날 일으켜 세워 준 소설 친구들, 본인보다 더 기뻐해주신 박기동 스승님, 멋지다! 김혜순 선생님, 제 소설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내 침대의 좌청룡 우백호 김정호, 김진하 군 사랑합니다.

△1974년 서울 출생 △1998년 상명여대 교육학과 졸업 △2000년 서울예대 문창과 졸업 △현재 프리랜서 작가 겸 주부

▼심사평▼

예심을 거친 9편의 단편소설 가운데 ‘비틀즈의 다섯 번째 멤버’ ‘사이다 무덤’ ‘손톱’ ‘통근버스’ 등 4편을 관심 깊게 읽었다. 전체적으로 일정한 수준을 갖춘 작품의 수가 늘어난 느낌이지만 반면에 이것이다 싶을 만큼 한눈에 우뚝 솟아나 보이는 작품은 없었다.

‘통근버스’는 흥미로운 소재를 선택한 편이나 짜임새가 너무 평면적이다. ‘사이다 무덤’은 서술능력에 안정감이 있고 정황묘사도 인상적이다. ‘도시와 시골의 경계지점’에 놓인 간이터미널의 분위기, 쌀알을 세며 기다리는 소녀의 심리, ‘사이다 무덤’은 달고도 날카로운 이미지를 살려내는 능력이 돋보인다. 그러나 ‘학대하는 계모’의 주제가 낡은데다가 그 비중도 과장된 면이 있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당선을 다툰 작품은 ‘손톱’이었다. 탄탄하고 신선한 문장과 정확한 묘사, 정서를 조절하는 능력과 균형감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날카로운 것과 부드러운 것의 강렬한 대조, 목욕시키는 장면 등의 오래 남는 인상은 이 작가의 역량을 가늠케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현실성이 부족하거나 부적절한 정황설정(수갑, 극한적 인상의 감옥, 벽에 걸린 가방, 뜯어낸 쪽마루 등)이 당선작으로 정하는데 끝내 방해가 되었다.

당선작 ‘비틀즈의 다섯 번째 멤버’는 서술의 흐름과 톤을 세심하게 조절하면서 구성요소들을 하나의 전체 속에 적절하게 배열 혹은 반복하여 일정한 분위기와 정서를 산출하는 능력에 있어서 탁월하다. 여인숙, 자루 안에 담긴 개, 핏자국이 묻은 텅 빈 자루, 술, 화투, 폭행 등으로 표상 되는 ‘사내’의 공격적 세계와 여자, 사진, 기타, 드레스, 피아노, 비틀즈, 그리고 노래를 관통하는 연약함, 추억, 탈출의 꿈을 상호대비 시키면서 ‘뉴스에도 나오지 않고 특산물도 없는 항구도시’속에 담아낸 아름다운 소품이다. 신문지에 찍힌 사진, 화분 속의 죽은 난초, 텅 빈 개집, 찌그러진 입간판, 동태의 충혈된 눈 같은 대상들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바라보는 시선의 고요함-거기서 솟아나는 암시력에 이 작품의 힘이 있다. 치열한 작가정신의 수업은 정작 이제부터다.

박 완 서 소설가

김 화 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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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틀즈의 다섯번째 멤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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