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우표수집 전도사 남창우씨

  • 입력 2002년 9월 29일 18시 30분


남창우씨가 동아일보의 한일 월드컵 사진전을 통해 배부된 사진엽서에 월드컵 기념우표를 붙이고 통인일부인(우체국직인)까지 찍어 만든 우표수집작품. - 사진=박영대기자
남창우씨가 동아일보의 한일 월드컵 사진전을 통해 배부된 사진엽서에 월드컵 기념우표를 붙이고 통인일부인(우체국직인)까지 찍어 만든 우표수집작품. - 사진=박영대기자
연우성학(硏郵成學). ‘우표를 연구해 학문을 이룬다’는 뜻이다. 남창우(南昌祐·55)씨가 연하장에 즐겨 쓰는 신년 휘호다. 호사가의 휘호 치고 거창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글귀에는 ‘우표수집 전도사’ 남씨의 한평생이 담겨 있다.

남씨에게 우표 수집은 취미가 아니라 ‘천직’이다. 그는 20여년간 생계도 팽개치고 전국을 떠돌며 학생과 일반인들에게 우표 수집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무료강연을 펼쳐왔다. 이를 통해 ‘저축’의 일환쯤으로 여기거나 기념우표 수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국내 우표 수집을 하나의 ‘문화’로 탈바꿈시키는 데 단단히 한몫해 왔다.

“우표를 왜 모으느냐고 물으면 자녀에게 물려주려 한다는 분들이 많았죠. 하지만 우표는 돈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즐거워서 모아야 합니다. 우표를 통해 삶의 가치관을 찾고 그를 통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떠가는 즐거움을 깨우쳐야 하죠.”

그 덕에 우표 수집에 눈을 뜬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 말에 수긍이 간다. 공룡 관련 우표를 모으다 고생물 지질학 등으로 관심이 확대되면서 자연사 학술용어 사전을 집필 중인 아마추어 학자, 전투기 조종사로 비행기 관련 우표를 수집하면서 항공기박사가 됐다는 공군장교, 요리 관련 우표를 모으다 요리사의 길을 걷게 된 대학생….

남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영국 아가씨와 펜팔로 우정을 쌓으면서 우표 수집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고교 졸업 후 월남전에 참전했다 돌아와 보니 형이 그가 수집한 우표를 팔고 있었다. 고엽제 후유증인지 시름시름 앓게 된 그는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결국 형이 펼친 사업을 이어받았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뚜렷한 병명 없이 구토와 고열, 혈변에 시달리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80년대 초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나 원 없이 해보자는 심정으로 우표 관련 자료를 품고 전국을 떠돌기 시작했다. 한번은 시골 초등학교 여학생의 편지를 받고 단 한 명의 수강생을 찾아갔다가 유괴범으로 몰리기도 했다. 수강생이 한 명이든 몇 명이든 자신이 모은 우표를 가져가 나눠주고 직접 우표집을 만들게 했다. 마치 자신의 남은 생명을 한 움큼씩 나눠주듯이.

비우면 오히려 채워진다고 했던가. 시한부 생명을 사는 것 같았던 그는 이제 이 일을 20년째 해오고 있다. 정보통신부도 그의 열성에 감복해 96년부터 강연료를 지급하고 교재용 우표도 공급해준다. 그는 지금도 1년에 70여 회씩 강연을 펼치고 있다. 매년 전국 어린이 우표전시회도 개최한다. 가장 고마운 일은 그가 우표에 담아 전달한 사랑이 되돌아 올 때다.

몇 년 전 겨울 정통부 고위 관료가 그에게 전화를 했다. 줄 게 있으니 차를 갖고 집으로 찾아와 달라고. 그는 위궤양이라고 해서 수술을 받았는데 아무래도 위암 같다며 사과박스 7개 분량의 우표를 내놓았다. “내가 평생 모은 겁니다. 남선생이 아이들에게 나눠주세요.” 그는 보름 후 숨을 거뒀다.

지금 고3이 된 한 여학생은 중학생 때 그의 지도로 우표 수집에 입문해 ‘포유류’ 분야의 전문 컬렉터가 됐다. 어느 날 그 여학생이 자신의 우표집을 들고 찾아왔다. “선생님, 이 작품들을 다른 후배들에게 나눠주세요. 저는 다시 시작할게요.” 그녀는 어린 나이에 이미 우표 수집의 참 맛이 ‘모으기’를 넘어 ‘베풀기’에 있음을 깨우친 것이다.

지금도 15평 아파트에 ‘마음이 부자인 집’을 가훈으로 걸어놓고 살아간다는 남씨는 정작 자신은 변변한 우표 수집품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인연을 맺은 제자들과 매달 꼬박꼬박 우표를 붙인 편지 50여통을 주고받고 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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