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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8월 26일 18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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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6·25전쟁 와중에 마땅한 연고가 없는 상태에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1950년대 임시직을 얻어 궁핍한 생활을 꾸려 가던 그는 결혼식을 올린 지 반년만에 친척들이 마련해 준 결혼반지까지 팔아야 할 정도였다. 이러한 형편을 안 미당 서정주(1914∼2000) 시인은 생전에 김씨 가족을 돌봐주었다.
김씨는 “미당은 소월의 시와 그 혈육을 아끼는 마음으로 취직, 학비 제공 등의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며 “내 딸 은숙의 고교시절 학비를 거의 미당이 댔다”고 공개했다.
미당은 1960년대 음반 외판원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김씨에게 주변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1967년에는 미당의 주선으로 당시 예술원회장 및 문인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던 월탄 박종화가 시인 구상과 함께 이효상 국회의장에게 취직 추천서를 써주기도 했다.그는 “몇 년 전 소월장학회를 설립하기 위해 10억원 가량을 모금했었으나 이를 추진하던 분이 작고한 뒤 기탁금을 환불했다”면서 “부친의 유품과 관련자료를 모아 ‘소월기념관’을 건립했으면 좋겠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