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기자의 현장칼럼]종로서적, 안타까운 몰락의 역사

  • 입력 2002년 6월 27일 16시 11분


부도난 종로서적의 텅 빈 매장 [사진=전영한기자]
부도난 종로서적의 텅 빈 매장 [사진=전영한기자]
종로서적은 국민이 책을 읽지 않아서 부도가 난 것이 아니다.

종로서적이 국내 최고 서점의 자리를 내주고 결정적으로 뒤로 밀려난 때는 출판의 불황기가 아니라 오히려 호황기였다.

종로서적은 교보문고가 등장해 거센 도전을 해오면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받고 있었다. 그러나 10년이 넘도록 제대로 실행에 옮긴 것이 없었다.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종로서적은 서점계에서는 최고의 직장이었다. 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유능한 직원이 하나 둘 떠나가기 시작했고 회사는 이들을 붙잡지 못했다. 그런 상태로 또 10여년이 흘렀다.

올 들어 교보문고가 사상 최대의 월 매출액(3월 185억원)을 기록하는 출판업의 호황 속에서 종로서적은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국내 출판계는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전반까지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8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일기 시작한 출판붐에 힘입어 90년 출간된 ‘소설 동의보감’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했고 93년 출간된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400만부가 팔려 인구비례에 따른 판매량으로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기록을 세웠다. 종로서적은 이 시기에 결정적으로 교보문고와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셔터가 내려진 출입구에는 벌써 중국어 전문 학원이 생긴다는 안내문이 나붙었다 [사진=전영한기자]

김영수 비엔비북스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81년 종로서적에 입사해 87년 을지서적으로 옮겼다. 그가 입사하던 바로 그해 교보문고가 문을 열었다. 교보문고가 정상궤도로 들어서는 데 3∼5년이 걸렸으므로 85년 무렵까지만 해도 종로서적은 여전히 최고의 서점으로 통했다. 종로서적은 교보문고라는 라이벌 서점이 생겼음에도 함께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위협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종로서적의 매장에 익숙했던 손님들도 서서히 교보문고의 편리함을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손재완 영풍문고 사장은 그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범한서적에서 근무하다 교보문고 설립시 직장을 옮겨 92년 영풍문고가 생길 때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교보문고를 세우면서 우리는 외국의 서점들을 둘러보고 3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1개 층에서 모든 책을 볼 수 있도록 한다. 둘째, 책은 서점 직원의 손을 거치지 않고 손님이 자유롭게 빼서 볼 수 있도록 한다. 셋째, 가능한한 국내에서 출판된 모든 책을 갖춰 놓는다.”

종로서적이라고 가만히 눈뜨고 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교보문고의 등장을 앞둔 79년 기존의 대한성서공회 건물 옆에 기독교서회 건물을 빌려 4∼6층까지를 기존 매장과 연결해 공간을 확장했다. 그러나 막상 교보문고가 들어서고 보니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김 사장은 85년 무렵 종로서적 기획과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종로서적 뒷건물을 사용하고 있던 출판사 박영사가 서대문으로 자리를 옮길 때 절호의 기회가 왔다”며 “회사측에 박영사 건물과 종로서적을 T자로 연결해 획기적으로 매장을 넓혀보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회사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종로서적은 여전히 신학기에는 손님들을 줄 세워서 책을 팔아야 할 정도로 붐볐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그건 호황이 가져온 기만일 뿐이었다.

종로서적은 장하구(84) 장하린씨(81) 형제가 63년 인수한 회사다. 70년대 종로서적의 전성기를 구가한 장하구 사장은 80년대 들어 동생인 장하린 부사장에게 사장 자리를 넘겨주고 자신은 회장을 맡았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경영권을 쥔 장하린 사장은 변화를 쫓아가기에는 감각이 달랐다. 명동 향린교회를 세운 독실한 개신교 장로인 장 사장이 6층 서점안에서 접근성이 가장 좋은 2층 매장에 기독교 서적을 전시하는 방침을 고수한 점은 그사례 중 하나다.

60, 70년대 우리나라의 유일한 대형서점이었던 종로서적은 당시 모든 면에서 앞서 갔다. 다른 서점들이 겨우 10평 규모일 때 100평 규모(부도 당시는 1500평 규모)를 자랑했고 네온 사인 간판, 대리석 바닥 장식, 천장의 샹들리에는 서점으로서는 처음이었다. 직원들의 복지 수준도 최고여서 고졸 여직원의 입사 경쟁률은 100 대 1이 넘었고 종로서적 여직원이라면 묻지도 않고 신부감으로 데려간다고 할 정도로 남자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그러나 10년 사이에 종로서적은 모든 면에서 뒤졌다. 경쟁사가 생기면서 임금의 상대적 박탈감은 커지고 휴무는 줄고 근무시간은 늘었다. 회사의 인재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다. 매출이 눈에 띄게 감소하는 가운데 회사발전방안을 두고 경영진과 직원간의 갈등이 싹텄다. 그 과정에서 많은 골이 생겼다.

회사를 떠난 직원들은 교보문고나 새로 생기는 대형서점 등으로 옮겨갔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언제부터인가 교보문고 직원들에게 책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면 금방 찾아주는데 종로서적 직원들에게 부탁하면 제대로 찾지 못하는 때가 왔다”며 “그때 ‘옛날의 종로서적이 아니구나’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장하린 사장은 안되겠다 싶었는지 90년 회장으로 물러나고 후임에 내부 승진자인 이철지 사장(현 부평 싱크빅문고 사장)을 앉혔다. 당시 종로서적은 영풍문고의 등장을 앞두고 엎친데 덮친 격의 위기에 봉착했다. 그도 ‘매장의 변화’에 회사의 운명이 걸렸다고 판단했다. 영풍문고가 생기고 난 후에는 최고의 서점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변신을 해야 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종로서적은 1층부터 매장이 시작되지 않고 2, 3층부터 매장이 시작된다. 대한성서공회 건물쪽에는 1층에 피자 가게가 있고 기독교서회 건물쪽에는 1, 2층에 은행이 있다. 피자 가게나 은행을 내보내는 데는 수십억원의 권리금을 내야 했다. 그러나 회사의 영업이익은 막대한 임대료와 인건비를 제하면 남는 것이 없었다. 당시만 해도 은행의 대출제도가 발달하지 않아 돈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도저도 안돼 출입구쪽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려 해도 건물이 우리 것이 아니어서 뜻대로 할 수가 없었다. 아예 서점 자체를 옮기는 일도 종로서적이 장소의 역사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어 실행하기 힘든 것이었다.”

종로서적을 위협하던 교보문고도 설립 이후 근본적 변화를 요구받은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92년 영풍문고가 개장하기에 앞서 교보문고는 무려 1년간이나 휴관을 하고 확장공사를 했다. 같은 층에 있던 식당 상가 등을 없애고 매장을 1500평에서 2500평으로 넓힘으로써 전략적 변신을 감행했고 지금까지 서점업계 1위 자리를 고수할 수 있었다.

종로서적의 창업주들은 더 이상 투자하지 않았다. 그나마 투자할 여력이 있는 사람은 장하린 회장보다 장하구 전 회장쪽이었다. 장 전 회장은 부인이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서 유명한 산부인과를 운영하고 있어 꽤 돈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동생에게 경영권을 넘긴 데다 가족처럼 여겼던 직원들 중 일부가 87년 강경 노조를 만들어 사측과 갈등을 빚자 환멸을 느껴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게다가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기에는 너무 고령이었다.

종로서적은 80년대 이후 한번도 전략적 변신에 성공하지 못했함으로써 쇠망의 길로 들어섰다. 이철지 사장이 97년 물러난 이후 잠시 민병인 사장이 맡았으나 실질적으로는 장하린 회장의 아들인 장덕연 현 사장이 주도권을 쥐었다. 영풍문고는 92년 개장 때부터 지하철 1호선 종각역과 연결됐다. 96년말에는 지하철 5호선 개통과 함께 광화문역이 바로 교보문고에 이어졌다. 종로서적은 손님을 철저히 빼앗긴 채 예고된 부도를 맞았다.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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