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이 조선후기 철학에 미친 영향]인간-세계-자연-우주관…

  • 입력 2002년 6월 16일 21시 20분


성호 이익의 묘
성호 이익의 묘
조선에 서학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초부터였다. 예수회 신부였던 마테오 리치와 그의 선배인 미카엘 루제리가 유럽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것이 1580년경이었고, 이들의 활동이 조선에 전해지고 조선인들이 이들에 대해 본격적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630년경부터였다. 이 시기 서구 문화와의 접촉이 18, 19세기에 서구 열강의 침입과 달랐던 점은 서구 열강의 적극적 침투가 아니라 조선 내부의 자발적 요구에 의해 서구 문화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 서학에 대한 관심은 과학기술에 대한 것과 종교, 즉 천주교에 대한 것으로 나눠 볼 수 있다. 그러나 서구의 과학기술 때문에 천주교를 포함한 서구 문물에 관대한 입장을 취했던 사람도 많았고, 또 천주교를 받아들임은 곧 서양의 세계관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문화수용의 관점에서 볼 때 과학기술과 천주교를 분명하게 나누기는 어렵다. 당시에 동아시아에 전해진 천주교는 아직 중세에 뿌리를 둔 것이었지만, 그것은 또한 서구 근대 문명을 탄생시킨 문화의 토양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가 서구와 함께 근대를 이뤄나갈 토대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이전, 서학을 통한 서구 문화와의 만남은 조선인들이 기존의 인간관, 우주관, 자연관, 세계관 등에 대해 근본적 반성의 기회를 갖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조선 사람들은 인격신의 천지창조론과 만민평등론, 나아가 임금 위에 신을 설정하고 제사를 우상숭배로 여기는 서학을 보면서 그 때까지 절대적인 것으로만 믿어 왔던 유교 윤리와 사회제도 전반에 대해 반성해 볼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됐다.

천주교 창립 선조 묘역
권철신 일신 형제와 이벽 이승훈 정약종 등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선조를 모신 묘역.

서학의 천당지옥설은 불교의 인과응보설과 마찬가지로 도의(義)를 따라 자연스럽게 화복(禍福)을 얻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이익(利)을 좇도록 가르치는 것이라고 비판한 것을 보면 여말선초에 정도전이 펼쳤던 배불론(排佛論)과 다르지 않지만, 이익을 좇는 서양인들은 이미 동아시아인들보다 훨씬 발달한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문화 충격의 경험으로 인한 주요한 성과가 바로 조선후기 실학이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서학’과의 비교를 통해 기존의 조선성리학을 반성하며 새로운 철학사상적 돌파구를 찾았던 것이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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