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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6월 13일 20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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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의 씨를 받은 레다는 헬렌을 낳았다. 헬렌은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됐다. 지아비이자 스파르타 왕인 메넬라오스를 제쳐 두고 트로이 왕자 파리스와 사랑에 빠져 트로이로 도주했던 것이다. 메넬라오스는 헬렌을 되찾기 위해 트로이 공격에 나섰다. 그리스 신화는 제우스의 여성편력기이자 불륜의 신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은밀한 유혹’‘베사메무쵸’는 돈을 받고 아내를 빌려 주는 합법적 불륜을 담았다. 영화 ‘아이스 스톰’ ‘클럽 버터플라이’는 부부를 교환하여 섹스를 벌이는 스와핑을 소재로 삼은 것이다. 영화 ‘차이나 타운’은 자신의 딸을 불륜의 대상으로 삼은 근친상간의 이야기다. 불륜의 뷔페에 초대받은 느낌이다. 그러나 이같은 예들은 맛보기에 불과하다. 예나 지금이나 TV 드라마나 멜로 소설의 붙박이 소재는 불륜 아니던가.
왜 일부일처제를 부정하는 불륜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는 걸까? 남녀의 외도는 본성이기 때문이다. ‘일부일처제의 신화’를 저술한 동물학자이자 심리학교수인 데이비드 바래시는 외도를 부추기는 것은 도덕의 쇠퇴와 같은 사회적 환경이 아니라 ‘생물 존재 자체의 명령’이라고 밝혔다. 본성이 명령한다는 것이다!
다국적 주택 리모델링업체 르로이 메를린(Leroy Merlin)이 자기 집 수리를 직접 할 수 있는 장비들을 내놓았다. 이들 광고를 브라질 상파울루의 레오 버넷(Leo Burnett)사는 불륜을 소재로 제작했다. ‘당신이 맘 놓고 있을 때 아내는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을 것’이라는 전형적인 소재를 썼다.
남편이 문을 열고 들어와 보니 아내는 배관공과 눈이 맞아 환희에 빠져 있다. 놀란 남편의 동그래진 눈. 시계를 들여다 본 남편의 표정이 착잡하다. 배관공은 업무상 집을 방문했다. 두 남녀는 ‘남편이 불시에 돌아올 확률은 만에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뿔싸! ‘만에 하나’라는 복병에 덜미를 잡힌 것이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에서 보여 준 야성적인 남자와 정숙해 보이는 주부 사이에 타오른 불륜 이야기의 광고 버전이다.
마치 스티커처럼 사진 좌측 상단에 붙은 카피는 ‘당신 스스로 하는 것이 낫겠군요.’
스캔들에 열중하고 있는 남성의 등 뒤에는 그의 직업이 배관공임을 알게 하는 글이 쓰여 있다. 이 글자는 카피와 마찬가지로 고딕체로 쓰여 있다. 동일한 글자체가 두 가지를 함께 읽도록 시선을 유도한다. 집에 드나드는 낯선 남자 좋은 일 시키지 말고 르로이 메를린을 활용해 집안 수리를 직접 하라는 메시지가 하나로 읽히는 것이다.
바래시에 따르면 정자는 적은 투자로 거의 무한대로 만들어진다. 대부분의 포유류는 연속사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수컷은 가능한 한 많은 배우자를 두려 한다. 암컷은 어렵게 만들어지는 난자에 정자끼리의 경쟁에서 승리한 우수한 정자를 수정시킬 수 있도록 여러 수컷과 교미를 한다고 한다. 수컷과 암컷의 딴짓하기는 생래적인 본능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 동물 생태 연구 결과 밝혀진 셈이다. 만물의 영장이라지만 인간은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가? “인간은 사람 앞에서는 정절을 말하면서도 뒤에서 딴짓을 하는 위선 성향이 있는 종”이라는 것이 바래시가 내린 인간이란 종의 정의다.
4000종이 넘는 포유 동물 중 확고한 1대1 관계를 맺는 것은 겨우 10여 종에 불과하다 한다. 조류의 10∼40%가 혼외 수컷들의 자식이라는데 ‘잉꼬 부부’란 표현이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일부일처제가 도덕에 의해 씌어진 ‘성의 사회사’의 정사(正史)라면 불륜은 우리 동네 김씨 이씨 박씨에 의해 쓰인 야사(野史)이다. 학교에선 정사를 배우고 일상에선 야사를 읽는다. 그것이 인간이다.
김홍탁 광고평론가·제일기획 크리에이티브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