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박완서씨 '문학과 사회'에 단편 '그남자네 집' 발표

  • 입력 2002년 5월 20일 18시 34분


아차산 기슭의 자택 정원에서 포즈를 취한 작가 박완서
아차산 기슭의 자택 정원에서 포즈를 취한 작가 박완서
주말이 가까운 고요한 5월 오후, 작가 박완서(71)의 경기 구리시 아천동 집을 찾았다. 아차산 품속에 바짝 안겨있는 마을에는 아카시아꽃의 달콤한 향기가 진동하고 있었다. 한 시간이나 앞당겨 도착한 길이었지만 초인종을 누르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작가는 잔디마당 저편 현관에서 구슬같은 함박웃음으로 기자를 맞았다. 기자는 먼저 어디선가 ‘흘려들은’ 엉뚱한 정보를 들이밀었다. ‘필생의 대작이 될 장편을 준비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는 펄쩍 뛰었다. 난처하다는 듯한 미소가 흘렀다. “아이고, 큰 작품을 쓰겠다고 ‘사람’하고 약속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났어요. 한다면 내 몸하고 협상을 하든가 약속을 해야지….” 계간지에 연재한 가장 최근의 장편 ‘아주 오래된 농담’도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되 삐걱거리는 몸과 한동안 티격태격한 산고의 산물이었다는 것. 그렇다면 앞으로 작품은 얼마나? 그의 대답에 ‘폭탄’이 실려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일단은 일 년에 단편 하나쯤만 하려고 합니다. 우선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 한 편이 실립니다. 읽어보세요.” 미소가 담긴 그의 말이 여운을 남겼다.

작가와 얘기를 마치고 돌아온 기자는 서둘러 ‘문학과 사회’ 게재가 예정된 그의 새 단편 ‘그 남자네 집’을 입수해 읽었다.

그랬구나! 작가의 오묘한 미소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최근 TV책소개 프로그램에 방영된 이후 석달 반동안 60여만부가 판매될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는 장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와 ‘그 산이 정말 있었을까’에 살짝 끼워맞춰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이야기, 절절하기 이를데 없는 사랑 이야기가 담겨있었던 것이다.

작품 속에서 ‘나’는 새로 이사한 후배의 초대로 그의 돈암동 집을 방문한다. 전쟁후 결혼 전까지 살던 그 동네에서 ‘나’는 기억을 더듬어 ‘그 남자의 집’을 찾아나선다. 위엄있는 ‘조선기와’의 한옥이 예전처럼 버티고 섰고, 마당에 가득한 나무들의 자태에서 ‘나’는 ‘그 무성한 그늘에서 관옥(冠玉)같이 아름다운 청년이 단 꿈을 꾼’ 걸 본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 남자’는 학창시절 같은 동네로 이사온 어머니의 먼 친척. 가슴 두근거려지는 대학 신입생 시절도 잠시, 전쟁이 터지고 두 집은 풍지박산이 난다. 잿더미가 된 서울에서 ‘나’는 국군에 징집돼 상이용사 처분을 받았으나 겉은 멀쩡해서 돌아온 ‘그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 남자’가 의사인 그의 누님에게 돈을 융통하러 서울을 떠날때마다 ‘나’는 ‘하루만 더 그 무의미, 그 공허감을 견디라 해도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하루하루 절박하고도 열정적으로’ 그 남자를 기다란다.

그러나 벼락치듯 ‘나’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버린다. 왜 그랬을까.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새들의 생태를 그린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그는 깨닫는다. ‘작아도 좋으니 하자 없이 탄탄하고 안전한 집에서 알콩 달콩 새끼 까고 살고 싶었다. 그의 집도 우리 집도 사방이 비 새고 금 가 조만간 무너져내릴 집이었다.’

기자는 서둘러 다시 다이얼을 돌렸다. 문학담당 기자가 간혹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무뢰한 질문, “작가의 체험이 몇 퍼센트나 반영되어 있는가?”를 묻기 위해서. 그러나 작가는 중국여행을 떠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지나간 고난의 세월, 안온한 피난처로서의 집이 절박했던 시절…. 그 시절을 힘겹게 보낸 작가는 이제 좌우의 산자락이 지켜주듯 둘러싸고 있는 집에서 온갖 초목을 돌보는데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작품속의 ‘그 남자’의 전쟁전 한옥이 그랬듯, 작가의 집에는 오월을 맞아 온갖 싱그러운 꽃들이 자태를 자랑했다.

“아침이면 이슬 머금은 꽃들이 기지개를 켜고, 어제 못보던 봉오리가 또 열려있고… 이 기쁨 만큼은 죽는 날까지 한결같을 것 같아요”라고 작가는 말했다. 그 안온한 집에 이제 그의 ‘새끼’ 며 손주들이 ‘알콩달콩’ 산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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