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의 완성 '모자'

  • 입력 2002년 1월 24일 15시 23분


서울 홍익대앞 모자전문점 꽁블에는 중년의 수강생들이 있다. 취미삼아 모자 만드는 법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열성파다. 최혜정 사장(35)은 프랑스 모자전문학교 CMT에서 공부한 뒤 5년전 이 가게를 열었다.

50대 주부손님인 김모씨는 동생뻘인 최사장에게 꼬박꼬박 “선생님”이라면서 “실력이 좀 쌓이면 ‘실버 모자 클럽’을 만들 생각”이라고 말한다.

“남의 시선에 신경 쓸 일 많은 한국사회에서는 중년이나 돼야 ‘특이하다’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고 멋진 모자를 쓸 수 있는 것 같아요. 머리가 빠지기 시작하는 나이대의 사람들에게는 필수품이라서 용인되는 거겠죠? 이제 친구들과 멋진 모자를 서로 만들어 주거나 선물하는 클럽을 만들고 싶어요.”

“왜, 얼마전에 모자 한 번 써보고 싶다고 찾아왔던 은행장 한 분 계시잖아요.”

“어, 맞아요. 처음엔 창피해 하시더니 요즘엔 자주 오시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남자 단골들은 교수, PD, 변호사 같은 전문직종 분들인 것 같네요?”

“샐러리맨은 부장급이나 돼야 찾아오시고요. 우습네요. 호호호.”

최사장과 주부 김씨가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데 마침 40대 주부가 가게문을 빼꼼히 열었다. 서교동에 사는 박숙영씨(45). 손에 들린 건 회색 베레모였다.

“이건 저랑 잘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바꿔갈께요.”

박씨는 “친구들 사이에 모자가 패션의 최대 화두”라고 말했다. 그는 “몸매에는 자신이 없는 우리 나이대 친구들도 모자 하나로 크게 분위기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죠. 제가 모자 마니아인 걸 알고 컨설팅을 의뢰하는 친구들도 있답니다”라면서 다른 모자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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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블에는 지난해 말 이후 모자를 찾는 중년들이 부쩍 늘었다. 호기심 많은 20대 손님도 많지만 실용적 목적으로 찾는 ‘충성파’는 중년이다. 최 사장은 “처음에는 손님 10명 중 9명이 구경만 하고 갔는데 지금은 40% 정도가 사간다”고 말한다. 소품의 전반적인 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골프 인구가 늘어나 모자를 쓰는데 익숙해진 중년이 많아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최씨 나름의 분석이다.

요즘 손님들이 즐겨찾는 디자인은 남성그룹 god가 즐겨 쓰는 변형된 투어링캡이나 중절모 스타일. 코바늘 뜨개질한 모자도 잘 나간다. ‘벙거지 모자’라고 불리는 클로슈도 나이를 불문하고 팔린다.

벨트와 구두에서 ‘모자’로. 액세서리에 대한 관심은 이제 머리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힙합패션의 유행과 함께 인기를 모았던 ‘벙거지 모자’나, 미국에서 들어 온 ‘대학생 패션’의 영향으로 90년대 후반 유행을 이끌었던 ‘야구모자’가 클래식한 분위기의 모자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다.

전문가들은 모자 유행이 지난 몇년간의 ‘복고 바람’과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최근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는 담배를 빼 물고 투어링캡을 뒤집어쓰고 다녔다. 오드리 헵번 등 옛 할리우드 여배우들도 요즘 시각으로 보면 ‘복고풍 의상’에 멋드러진 모자를 눌러썼었다.

동덕여대 의상디자인학부 간호섭 교수는 “2002년 패션 코드로 등장한 보보스적 히피스타일 유행의 연장선에서 봐야 한다”고 말한다. 간 교수는 “야생동물 털의 거친 느낌을 살린 모피 모자가 최근 명품 브랜드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것은 정제되지 않은 자유를 나타내는 보헤미안룩의 인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겨울을 겨냥해 선보였던 파리, 밀라노, 런던의 프레타포르테(고급 기성복 컬렉션)를 분석한 김유리 패션평론가는 “루이뷔통, 크리스찬 디오르, 프라다, 돌체&가바나는 모피털 소재의 챙이 없는 ‘코사크캡’, 폴 스미스 우먼은 챙 넓은 ‘카플린’, 셀린느와 줄리앙, 맥도날드는 ‘더치 보이 캡’을 선보이는 등 패션에서 모자가 크게 부각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파리 오트쿠튀르(고급 맞춤복 컬렉션)에서도 런던 출신의 모자 디자이너 필립 트레시의 독특한 모자들이 화제가 됐다.

유행을 이끄는 사람도 모자를 자주 쓴다. SBS 수목드라마 ‘지금은 연애중’을 보면 여자 주인공 3명과 남자주인공 1명이 모두 모자를 쓰고 나온다. 채림은 체크무늬 투어링캡, 이의정은 챙이 눈썹 바로 위까지 내려 오는 흰색 햇, 최윤영은 감색 베레, 소지섭은 니트캡 등 서로 다른 모자로 극 중 배역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얼마 전 5집을 발표한 가수 박지윤도 앨범재킷에 중절모를 쓴 사진을 실었다.

크리스찬 디오르, 비비안웨스트우드, 루이뷔통, 헬렌 카민스키 등 유명브랜드들이 최근 가장 많이 내놓는 아이템은 중절모, 베레, 천연 나무를 손바느질해 만든 라피아 등이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오드리 헵번, ‘카사블랑카’의 잉그리드 버그만의 ‘그때 그모자’ 모티브를 딴 것들도 많다. ‘라피아’는 헬렌 카민스키의 상표명이었으나 일반명사가 됐으며 힐러리 클린턴, 니콜 키드먼, 파멜라 앤더슨 등 미국의 유명인이 많이 써서 유명하다. 청년도 중장년도 온통 모자, 모자, 모자…. 모자 열풍이다.

조인직 기자 cij1999@donga.com

김현진 기자bright@donga.com

그래픽 정인성 기자 71j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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