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대학생 학력저하 下]'쉬운 수능' 부작용 보완 서둘러야

  • 입력 2001년 4월 30일 19시 01분


“7차 교육과정으로 교육받은 고교생이 대학에 들어오는 2005년부터 초등학교 5학년 수준의 수학 실력으로 대학에 들어오는 학생이 실제로 있을 것입니다.”(호서대 이춘호교수)

“수능 세대의 학력이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어 대학도 교습방식을 바꾸고 교재를 개발하는 등 대책이 필요합니다.”(서울대 최형인교수)

서울대 연세대 건국대 한성대 호서대 등의 자연대 경영대 공대 사범대 교수들이 99년말 대학생 수학교육의 위기에 대해 토론한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다.

학력저하는 최근 몇 년간 대학 교육의 중요한 화두가 됐다. 그만큼 학력저하에 대한 원인 분석과 해결책을 위한 체계적 노력이 시급하다.

▽공부할 필요가 없는데〓서강대 사회대 2학년 전모씨(20)는 “고교에서 세계사를 배우지 않고 대학에 입학했지만 역사지식이 모자라 강의를 이해하는 데 애를 먹었다”면서 “대학생들은 시험 과목과 난이도가 자주 바뀌는 대학입시 제도의 희생양”이라고 말했다.

수시로 바뀌는 입시정책은 학생들의 학력저하를 부추기고 있다. 수능이 아주 기초적인 질문만을 던지는 상황에서 나오지 않는 문제나 분야에 대해 공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학생들이 대학 공부에 필요한 소양을 갖추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대학생 학력저하▼

- 上 "대학강의실 맞나요"
- 下 기초부실이 학문부실 불러

▽대학생 바로보기 필요〓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李泰鎭)교수는 고교 3년생 조카의 질문에 개탄을 금치 못했다. 조카는 이토 히로부미의 스승으로 알려진 일본 메이지 시대의 ‘기토’라는 인물에 대해 물었다. 이 교수는 고교생이 쉽게 알기 힘든 인물이라고 생각, 조카에게 어떻게 ‘기토’를 알았느냐고 되물었다. 이 조카는 “일본 만화의 주인공인데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컴퓨터 게임과 TV드라마, 만화책 등에서 왜곡된 역사지식을 얻는 대학생이 늘어나고 있다”면서 “독서를 통해 정확한 지식을 얻고 고민하는 학생을 찾아보기 힘든 추세”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어 “디지털 세대의 학생에 대해 기성세대의 잣대로 학력저하를 논하는 것이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요즘 대학생들은 예전과 다른 라이프스타일과 개성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대학에서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주로 읽고 토론하는 학회 활동은 위축되고 예전에 없던 ‘록밴드’ ‘댄스’ 동아리 등이 활기를 띠는 것도 이 같은 추세를 증명하고 있다.

한글세대로의 변화도 또 다른 요인. 최근 사법고시 수험서로 인기를 얻고 있는 민법교재도 한자를 한글로 바꾼 개정판이 나와 ‘신세대 고시준비생’들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을 정도다.

▽어떻게 풀어야 하나〓‘쉬운 수능’의 폐해를 보완할 입시제도의 변화는 누구나 공감하는 학력저하에 대한 기본 해법이다. 어려운 문제만 골라 풀어야 하는 예전의 입시가 아닌 기본 개념을 이해하고 활용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입시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수준높은 사고를 필요로 하는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말 그대로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되어야 한다.

대학도 칠판에 낡은 내용을 적어 내려가는 기존의 방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신세대 대학생에 걸맞게 대학이 교과과정과 교습방식을 바꿔야 한다. 외국처럼 대학들이 다양한 예비과정을 마련해 학생들의 학력저하를 예방하거나 보완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고려대 이과대 1학년 김영현군(19)은 “대부분의 강의가 칠판에 써 내려가는 식으로 진행되어 지루하다”며 “컴퓨터나 비디오 등을 이용해 강의하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과학기술원 수학과 한상근(韓相根)교수는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에 대한 동기를 찾아갈 수 있는 고등학교 교육 및 학생들의 수준과 수요에 맞는 차별화된 대학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준우기자>hawoo@donga.com

▼대교협 이현청총장의 '제언'▼

“대학생의 학력저하를 막으려면 입시제도를 보완하는 게 시급합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이현청(李鉉淸) 사무총장은 “대학생의 학력저하는 단기적으로는 입시제도에 의해 초래됐으며 다양한 변수로 인해 더욱 심화하고 있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이 총장은 “수능이 변별력을 지닐 수 있도록 난이도가 조정돼야 하며 대학은 부실한 특별전형과 성적 부풀리기 내신 등 부작용을 제거할 수 있는 평가기준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총장은 △수능을 고교졸업자격시험처럼 치른 뒤 개별 지원자의 전공에 맞춰 수학 물리 등 일부 과목에 대해 특화된 시험(선택 수능)을 치르거나 △초등학교 때부터 표준화된 학력고사를 1년에 1, 2차례씩 꾸준히 치러 무시험 전형을 하는 방식 등을 제안했다.

이 총장은 “이 같은 제도는 ‘내신 뻥튀기’ 등과 같은 부작용도 막을 수 있고 적절한 협력과 경쟁이라는 교육철학도 일궈낼 수 있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이 총장은 입시제도에만 얽매이면 대학생 학력저하의 근본적 해결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체 학령인구의 86.7%가 대학 등 고등교육기관에 취학, 대학교육의 대중화가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에서 일시적인 처방이 아닌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하다는 것.

이 총장은 “‘열린 교육’은 명분에만 집착하고 있고 학생들은 컴퓨터 게임과 채팅에 몰두하는데 초중고 교육은 그 리듬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으며 대학은 안일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많은 학부모가 높은 교육열을 과시하며 자녀들의 교육에 개입하고 있지만 사교육에 의존해 실제는 ‘교육학대’와 ‘교육방임’ 사이를 오가고 있어 교육현장이 황폐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총장은 대학들이 학생들의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학습동기를 유발할 수 있는 교습방식을 개발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학이야말로 열린 교육이 필요한 공간입니다. 개별학습을 활성화하고 다양한 학습보조센터를 마련해 보습교육이 충실히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김경달기자>d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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