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공모전 금상 오철수씨 감옥서 '9년만에 외출'

  • 입력 2000년 12월 14일 19시 11분


그림을 좋아하는 딸을 위해 오씨가 연필로 정성껏 그린 세밀화
그림을 좋아하는 딸을 위해 오씨가 연필로 정성껏 그린 세밀화
“아이고, 서울이 덥네요.”

얇은 생활 한복을 걸친 오철수씨(36·가명)의 첫 인사말이었다. 코트를 입고도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던 기자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는 ‘감옥 속 겨울’을 9차례나 견디고 있음을 일깨워줬다.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인 오씨는 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가 주최한 현상공모전에서 금상을 받아 9년 3개월만에 소중한 ‘외출’을 했다.

9일 시상식장인 서울 종로구 경운동 수운회관 대강당 2평 남짓한 대기실에서 그를 만났다. 테이블과 의자 3개만 놓인 작고 추운 공간이었다. 그는 “이 방보다 조금 넓은데서 10명이 지내는데 여름엔 괴롭지만 겨울은 차라리 지낼 만하다”며 웃었다.

건장한 체격에 얼굴은 우락부락했지만 웃음은 해맑았고 목소리는 믿음직스러웠다.

“왜 한자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합니까?” 말머리를 돌려 봤다.

“‘아빠 아빠’하며 따라다니던 두 살난 딸을 뒤로 하고 감옥에 왔습니다. 처음엔 절망하고 또 절망했지만 어떻게든 다시 가족과 행복하게 살고픈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목소리도 가늘게 떨렸다. 소매로 눈물을 훔쳐가며 그가 들려준 ‘감옥 공부 이야기’에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다.

그는 유원지 술자리에 합석한 낯선 사람과 사소한 시비 끝에 ‘사고’를 치고 말았다. 3년간 도망다니다 붙잡혔다. 절망이었다. 사랑하는 가족도, 밝은 햇살도 맘대로 볼 수 없었다. 10년 뒤에나 다시 만날 가족과 자유…. 그는 두 가지를 결심했다. 건강과 공부.

중학교 2학년을 중퇴한 그는 한자공부를 시작했다. 가장 손쉽게 배울 수 있었던 분야였다. 일과 시간에 목공장에서 땀흘려 일하고 휴식 시간과 자투리 시간을 펜글씨 쓰기에 투자했다. 연필로 쓰고 볼펜으로 덧쓰기를 거듭했다. 때때로 억누르기 힘든 울분과 짜증이 덮쳤다. 그때마다 아내가 보내준 딸의 사진이 안식처였다.

“미국에 돈 벌러 간 아빠를 기다리는 예쁜 딸, 절대 실망시킬 순 없지….”

그런데 뜻밖에 딸에게서 편지가 왔다. 사진 속에서 훌쩍 자란 딸은 벌써 초등학교 4학년. “부탁이 하나 있어요. 아빠 정말 보고 싶어요. 면회 가면 안되나요?”

감옥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놀랍고 당황스럽고 대견한 마음에 마냥 눈물이 났다.

어느 날 귀가 번쩍 뜨일 소식이 들려왔다. 한자능력검정시험에 합격하면 ‘가족 합동접견’을 할 수 있다는 것.

잠을 줄이고 손바닥에 한자를 적어가며 공부했다. 틈틈이 준비한 대입검정고시는 물론 한자검정시험 3급, 2급에 잇따라 합격했다. 짧은 시간,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품에 안고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딸이 만화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그림 연습에 몰두해 코끼리와 토끼 원숭이의 세밀화를 그려 보냈다. 1000여통의 편지가 오갔지만 딸의 편지는 그리 많지 않다. ‘편지를 자주 쓰고 싶지만 아빠와의 추억이 없어서…’라는 말을 전해듣고 가슴이 저며왔다.

금상 수상 덕분에 가족과 지낼 수 있는 ‘금쪽같은’ 1박 2일, 24시간이 주어졌다. 딸에게 편지를 썼다. “아빠와 함께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을 적어 보내렴.”

“함께 자전거 타고 자장면도 먹어요. 수영도 하고 스케이트도 타요. 커다란 곰인형도 사주세요. 놀이공원에도 같이 가요. 함께 편 먹고 엄마를 공격해요.”

귀 밑에 멀미약을 붙였지만 9년만에 타는 차는 힘들었다. 가슴이 벅차 자장면도 제대로 삼킬 수 없었다. 잠 한숨 못자고 뛰어 다녔지만 놀이공원 구경과 스케이트 타기는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9달만 견디면 새 인생을 시작합니다. 공부도 계속하면서 꿋꿋하게 가정을 꾸려온 아내와 착하게 커 준 딸을 데리고 정말 열심히 살렵니다.”

올 초 학사모를 쓰고 싶어 독학사 시험을 치기로 한 그의 목소리에는 ‘희망’과 ‘고집’이 묻어 있었다.

<김경달기자>d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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