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정부의 사죄와 배상은 우리 민족의 당당한 권리"

  • 입력 2000년 12월 14일 16시 37분


황호남 서기장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 피해보상대책위원회
황호남 서기장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 피해보상대책위원회
▲먼저 우리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지난 50년간 군사적 강점을 해온 일본에서 이렇게 만나게 되어 감회가 새롭습니다. 먼저 이번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국제 법정에 참가하게 된 배경과 특히 남북공동검사단 명의로 기소장을 작성하게 된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 금년도 3월 30일부터 4월 1일까지 중국의 상해에서 위안부문제에 관한 국제토론회가 진행됐었습니다. 그때 우리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 피해보상대책위원회(이하 종태위) 관계자들이 참석을 했고 같은 시기에 세계 여러 나라에서 관계자들이 모였습니다. 그때 2000년 법정 국제실행위원회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2000년 법정 헌장을 협의했습니다.

그리고 7월 28일부터 30일까지 필리핀 마닐라에서 위안부 문제는 북·남이 갈리기 전 조선민족에 가해진 사실이란 것에 기반하여 북과 남이 공동으로 기소장을 작성하는 것에 자연스럽게 공감하면서 합의하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누가 먼저랄것없이 자연스럽게 합의하게 된것입니다.

이후 9월 13일부터 17일 동안 대만에서 열린 국제실행위원회 및 국제 검사단 회의에서 북·남이 따로 만나서 공동으로 기소장 협의를 했습니다.

당시 우리는 "사회·역사적 배경 즉 조선반도에서 일본놈들이 20만에 달하는 여성들을 제멋대로 데려가 성노예로 만들 수 있었는가! 조선 여성들과 개개의 인민들을 보호해 줄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지 아니었는가! 그런 사회·역사적 배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우리 북쪽에서 맡겠다. 개별적인 피해사례와 전범자들에 대한 기소내용은 남쪽의 정대협에서 맡으라"고 견해를 나누었습니다.

또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실질적인 전범자들은 이미 죽었다. 그래서 죽었는데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역사는 그런 놈들을 심판한다.

그러나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이 바라고 외치는 것이 무언가 하면 개별적인 범행자들에 의해서 감행된 행위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당시 일본이라는 국가가 감행한 범죄다.

국가가 저지른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범죄다. 그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누가 하겠는가! 당연히 일본이 국가차원에서 진심으로 사죄하고 배상해야한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소장체계에서 사회·역사적 배경과 일본의 국가적 책임에 대해서 국제법적으로 밝혔습니다.

특히 지난 대만회의에서는 북과 남이 전체 기소장의 체계에 대한 합의를 하였습니다. 전체 기소장 체계는 첫째, 일본군 성노예제가 실시될 수 있었던 조선의 사회·역사적 배경에 대하여, 두번째로 개별범행자들의 책임에 대하여 세번째로 현 일본정부의 국가책임에 대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에서 당시 위안부 제도가 실시 할 수 있었던 배경에서 중요한 것은 무언가? 일제의 조선 강점은 어떻게 보는가? 우리는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 그 자체가 불법무도한 조약으로서 일본놈들이 일방적으로 날조한, '조약 아닌 조약'으로 보고 있습니다. 북과 남이 원칙적으로 합의한 것은 조선에 대한 일제의 강점은 군사적 강점이라는 것과 기소장체계를 위와 같이 정돈하는 것이었습니다.

대만에서 이 두가지를 합의하고 각기 돌아가서 기소장 작성을 하고 호상간 교환·검토하여 지금의 공동기소장을 만든 것입니다.

▲이번 행사를 준비하면서 그리고 본 법정에 참가하면서 느끼신 소감에 대해서 듣고자 합니다.

- 저희들 생각에는 당초 국제실행위원회가 이번 법정을 어떤 법정으로 만들어 낼 것인가 처음에 구상했던것과 조금 각도가 다른 것 같습니다. 그것은 역시 시민법정으로서 피해자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법정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런 모의 법정을 구상하고 계획을 추진시켜 왔습니다.

그리고 이번 법정 자체를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법정으로 만들고 싶다는 것도 실행위원회의 생각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저명한 판사들을 교섭하고 했는데 그 판사들이 이 법정에 관계하면서 많은 주문들을 한 것으로 저희들은 생각이 됩니다.

법정이라면 이러이러한 요구가 반영이 돼야하고 이러이러한 사항들이 충족이 돼야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구체적인 법적 증거자료가 충분히 제출돼야 공정한 판결을 내릴 수 있다고 요구를 한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모든 자료는 일본이 가지고 있으면서 대부분 소각·인멸시키고 그나마 남은 것 마저 공개를 안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무엇인가! 증거가 누군가? 생존자다. 피해자 할머니 자신이 가장 큰 증거이다.

무슨 공문서가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보다도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이 제일 큰 증거고 다음이 자료적인 증거인데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찾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자세히 수집을 했습니다. 더구나 70, 80넘은 할머니들이 법을 잘 압니까 ! 이런 위안부 행위가 우리 나라에서 식민지 군사적 강점시기에 감행될 수 있었던 사회·역사적 배경에 중점을 두면서 강조를 했습니다.

실제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면서 국가책임과 관련해서 법적 책임을 물었으며 법정으로서의 요구에도 대응하면서도 동시에 청중들에게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에 대해 다소나마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되겠다는 입장에서 이 사업을 준비한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일본 정부로부터 사죄와 배상을 받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 민족의 당당한 권리입니다. 거저, 남쪽에서 여기 이번 행사에 이렇게 많은 수가 참가한 것은 일본과 남조선의 경우 경제협력과 결부시켜서 이 문제를 풀어내려는 것에 대한 반발의 표시라고 생각해요.

이번 법정이 일본정부와 일본사람들이 우리 조선민족이 감행한 만행에 대해서 똑바로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번 행사에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 피해보상대책위원회라는 명의로 참석하셨는데 귀 단체에 대한 소개를 부탁합니다.

- 저희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피해자 보상 대책위원회는 1992년 8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일제의 과거 죄행과 관련해서 각계에서 연구사업을 하시는분들, 특히 법률가, 변호사, 역사학자등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호소를 해서 그런 사람들이 본 조직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현재 공화국에서 밝혀진 피해자의 총수는 218명(사망 50명)으로 생존자는 168명입니다. 그중 공개적으로 증언한 피해자는 43명(그중 20명 사망)입니다.

▲이번 행사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긴 하지만 최근 가장 우리 민족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안입니다. 지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연방합중국과의 관계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얼마전에는 미국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에 다녀가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클린턴 대통령도 곧 평양을 방문할 예정으로 알고 있는데 이에 대한 서기장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 우선 미국은 조선반도의 분단에 가장 직접적으로 책임을 지고 있는 그러한 나라로서 조·미 사이에 적대관계를 해소하는 것은 조선의 통일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현재 북과 남사이에 군사적 대치상태는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이러한 군사적 대치상태를 해소하고 북과 남이 자주적으로 우리 민족을 통일하겠다는 것은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측 군대의 통수권을 쥐고 있는 미군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군사적 대치상태를 해소하자고 해도 남측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조·미관계의 개선이라는 것은 역시 그 미군이 조선반대에 주둔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미국의 올브라이트가 공화국에 왔다간 것은 우리 공화국이 사상의 강국으로서 자기들이 예전처럼 무시할 수 없어 찾아오게 된 것 아닙니까?

미국이 찾아와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께서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한 어려운 상황과 특히 우리 공화국에 대한 미국을 우두머리로 한 세계연합 세력들의 고립·압살책동속에서도 우리 인민들을 올바로 이끌어 주신 것이며 이에 우리 인민들은 장군님만 계시면 끄떡없다는 것을 전 세계앞에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인 소개를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

- 예, 저는 학교를 여러 학교를 다녔습니다. 어학적인 측면에서는 일본말을 좀 배웠고 외국어 대학까지는 못 나왔습니다.

거저 강습소 같은 것을 나왔고 그리고 역사에 좀 취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특히 조·일관계사에 대해 제 나름대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나이는 서른 여섯이고 고향은 평양입니다. 여러 가지 연구사업과 집필사업을 하다보니 나이가 많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군대는 못 나갔습니다. 꼭 나가고 싶었는데, 사람마다 성장환경이 다르지 않습니까 !

저는 자신이 중학교 졸업해 가지고 청년 돌격대 생활을 좀 많이 했어요. 어떤 사람은 대학을 가고 어떤 사람은 군대에 나가고 하지요.

우리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동무들하고 청년 돌격대에 가지 않겠느냐 해서 좀 여러 해 동안 청년 돌격대 생활을 했습니다. 청년 돌격대도 철통같은 규율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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