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독서]'적이 사라진 민주주의'

  • 입력 2000년 8월 25일 19시 48분


최근 사회과학은 또 하나의 ‘에피고넨(아류)의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이른바 정보통신기술혁명의 놀라운 위력이 ‘제 3, 제 4, 제 5의 물결’을 만들어내고, 이러한 흐름은 거부할 수 없는 ‘메가 트렌드’라는 사실이 강조되는 가운데 정보기술의 변화 및 이 변화의 사회적 활용과 관련된 학술적 내용들이 발빠르게 ‘신학문’으로 자리잡아 왔다. 사회과학의 이 같은 경향은 효율성과 시장가치를 잣대로 하는 기술―경제적 패러다임을 강화했다.

이런 흐름은 ‘시장의 전횡’ 속에서 ‘사회의 죽음’을 재촉하는 현실을 학술적으로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런 현실을 강화하는 데 일조한 측면도 있었다. 이런 시장중심적 사회변동관은 전체 사회의 변화상을 보여주지 못함으로써 현실적으로는 사회발전의 전형 구축이 포기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변동론에서 거대담론이 소멸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런 왜소화를 뛰어넘는 사회과학의 모색, 즉 변화하는 ‘사회’의 내용과 변화하는 ‘정치’의 모습에 대한 지적 갈증을 다소나마 달랠 수 있는 그간의 탐색들이 ‘성찰의 사회학’을 일궈 온 일군의 학자들에게서 있어 왔다. 울리히 벡은 그 한가운데 서있는 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과학의 빈곤’ 속에서도 독창적인 사회학적 상상력을 통해 ‘위험사회’와 ‘성찰적 근대화’의 담론을 주도해 온 이래 왕성한 저술활동으로 이미 국내에도 충분히 낯익은 그를 또 하나의 번역출간물로 만나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벡은 이미 근대사회의 변동을 ‘성찰적 근대화’라는 일관된 논리로 설명하면서 위험의 분배, 일차적 및 이차적 과학화, 하위정치 등의 다양한 개념을 제공한 바 있다. 우리는 그를 통해 ‘자연과 사회와 인간에게 몰입했던 일차적 과학화의 단계’로부터 근대화 자체가 만들어낸 위험요소들이 스스로를 성찰하게 만든 새로운 근대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언제나 웅장하면서도 빠른 템포로 전개되는 벡의 글은 이 책에서 역시 특유의 거침없는 논의를 보여주고 있다. 다른 저술들이 20세기를 돌이켜보는 데 중심이 두어졌다면 이 책에서는 21세기적 변화에 주목하는 듯하다. 특히 동서 냉전체제의 붕괴를 대립적 사회구성의 소멸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고, 구체제 속에서 굳건히 구축된 권력질서가 다양한 ‘하위정치’의 확대를 통해 대체될 것을 예측하고 있다. 어쩌면 이 책은 “정치적인 것은 비정치적인 것이 되고, 비정치적인 것이 정치화된다”는 명제를 구체적인 논의를 통해 현실화하는 작업이라고도 볼 수 있다.

유의 아이들은 온갖 의무와 지겨운 일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재결집하고 있는 것이다.”

벡은 ‘자유의 아이들’이라고 명명한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서 즐거운 삶의 욕망과 풀뿌리 저항을 연결시킨다. 급격한 가치 체계의 붕괴는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듯이 개탄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라 ‘2차 근대(성)’를 향한 새로운 가치를 생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대성도 단순히 소멸돼 가는 것이 아니라 ‘개인화’의 추세 속에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해 가고 있다. 이제까지 공동체와 정치 참여는 구성원들이 특정한 장소에 얽매여 있다는 가정을 전제로 했지만 지구화를 통해 공동체가 없는 지역들, 그리고 특정 장소와 관계없는 공동체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벡은 그런 의미에서 여러 사회운동, 시민주도 집단, NGO 등이 정치적으로 권력을 잡았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밖에도 ‘노동’과 ‘가족’, ‘도시와 건축’, ‘환경 마키아벨리즘’ 등에서 이런 변화를 읽어 내며 이것이 정치의 약화가 아니라 새로운 ‘정치의 르네상스’와 ‘사회의 정치화’를 예고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의 현실은 다른 어느 때 보다 혼돈의 상태에 있다. 통일의 문턱에 성큼 다가서서 그야말로 ‘적이 사라질’ 현실의 거대한 변화, 세계시장주의의 범람, 환경갈등, 최근의 노사 및 의료분쟁, 여성운동 등 다양한 집단갈등의 폭증으로 야기된 복합혼란 속에서 우리 사회는 전통과 근대와 탈근대의 ‘삼중응축’현상이 어지럽게 전개되고 있다. 벡의 이 책은 이런 우리 현실에서 시의 적절한 지침서가 되기에 충분하다.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 울리히 벡 지음/ 정일준 옮김/ 새물결/ 336쪽 1만3000원▼

조대엽(고려대 강사·사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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