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포터/공연]은유·상징 가득한 사랑이야기 가무악'청산별곡'

  • 입력 2000년 6월 12일 16시 38분


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고려의 청산.

몽고의 침입으로 폐허가 돼버린 피난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도공 만경은 비취빛 청자를 굽는다. 만경은 순이와 혼례를 치루지만 몽고장수 일행의 침략으로 생명인 눈과 순이를 뺏긴다. 몽고장수의 겁탈에 대항하던 순이는 죽음을 맞이하고, 눈 먼 육신으로 청자를 빚던 만경은 청자 속에 새겨진 흰 새처럼 꿈 속으로 날아온 순이와 마지막 춤을 춘다...

지난 11일 공연을 마친 가무악 <청산별곡>은 가슴시린 사랑이야기다. 고려 민초들이 몽고의 침입으로 유민생활을 하면서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낸 노래이다. 끈질기고 강한 우리 삶, 우리 혼을 보여주는 춤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사랑이야기를 뛰어넘어 청자에 새기려는 하얀 새를 통해 고려인의 예술혼을 시사하고 있다. 새를 새기고픈 만경, 사랑하는 이의 생명을 댓가로 비로소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고통의 승화가 작품의 주요 골자이다.

무대는 빈공간이며 영원을 기원하는 청산의 나무 한 그루가 있을 뿐이다. 해금을 켜는 악사장이 나무 둔턱에 걸터앉아 해설자처럼 비극의 서사시를 예견한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최소한의 세트가 장소를 알려준다. 만경이 도자기를 빚는 곳은 돗자리 하나로, 몽고장수가 순이를 겁탈하려던 방은 빨간 등 하나로 묘사된다.

그림자극은 장시간이 소요될 수 있는 몽고군의 고려 침략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해와 달, 구름과 소나무, 새가 떠오른 청산에 말을 탄 그림자 인형들이 등장하면서 푸른 청산은 붉게 타오른다. 몽고 장군의 얼굴이 스크린을 뚫고 나올 정도로 확대되면 청산의 새는 사라진다. 악사들은 도자기나 다듬이 돌을 두드려 군대가 진입했음을 알린다.

의상 역시 농축된 상징을 보여준다. 몽고장수의 방에서 순이는 화려하게 치장된 옷을 입었지만 가면을 썼다. 무표정한 가면과 화려한 의상은 결코 행복하지 않은 순이의 내면과 외면 대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순이의 목 위에 버드나무처럼 길게 드리워진 수건은 슬픔의 기호이다. 순이와 몽고 장군은 이 긴 수건을 밀었다 당기며 겁탈과 정절 사이의 위험한 시이소오 게임을 한다. 결국 순이는 이 수건에 목이 졸려 죽는다.

각 장이 독립된 에피소드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춤극은 장면마다 극도의 은유와 상징을 사용함으로써 불필요한 설명이나 정서의 방출을 생략했다. 그래서일까. 각 장면이 매끄럽게 유기적으로 연결되기에는 자못 낯선 점이 없지 않았다. 한 장면의 춤이 다음 장면의 에너지로 이어진다기 보다는 그 장면에서 끝나버리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은유인, 고려인의 예술혼을 상징하는 만경의 청자빚는 모습은 프롤로그와 3막에 너무 미약하게 나와 그의 신분이 도공인지조차 의심케 만들었다. 작품이 의도하는 청자 속에 담긴 깊은 은유의 사랑얘기보다 오히려 표피적인 러브스토리를 따라가게 만드는 것은 지나친 생략에서 연유한 것은 아닌지.

카타르시스는 발산보다는 절제에서 나온다. 이 '절제'는 극도로 압축된 정서가 내재된 절제이다. 실명한 만경과 주검이 된 순이의 춤은 이 작품의 절정을 이루는 춤이다. 만약 이 순간 아무런 정서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만큼의 에너지를 무용수들로부터 받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처연하게 진행된 춤은 그림으로서는 아름다웠지만 감동을 주기엔 미흡했다. 고도의 은유와 상징은 바로 무용수들의 절제된 정서와 움직임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전통의 현대적 계승이란 측면에서 볼 때 가무악 <청산별곡>은 그 시도를 높이 살만 하다. 한국의 전통 장르인 가무악이란 종합예술을 통해 서양 뮤지컬 장르에 도전장을 내밀었으니까. 전통예술에 대한 오늘의 문법은 끝없는 실험과 시행착오를 통해 찾아질 것이다. 다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만큼 영혼을 울릴 수 있는 진정한 소프트웨어도 훈련되길 바랄 뿐이다.

홍란주 <동아닷컴 인터넷기자> wildran@m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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