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침묵의 언어'/인간이 문화속박서 벗어나려면…

  • 입력 2000년 3월 17일 19시 09분


▼'침묵의 언어' 에드워드 홈 지음/한길사 펴냄▼

“문화가 인간을 지배한다.”

저녁 7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면 몇 분까지 화를 내지 않고 기다릴 수 있을까? 물론 개인적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떤 문화 속에서 살아왔는지가 더 결정적인 요소다. 한국인과 중국인, 미국인, 독일인이 인상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시간은 각각 다르다. ‘저녁 7시’라고 약속할 때 당사자들 간에는 이미 ‘10∼20분 또는 30∼60분 정도는 기다려 줄 수 있다’는 문화적 합의가 전제된다. 시간의 길이와 의미는 문화에 따라 다르다.

이른바 ‘서울 문화지도’에는 ‘대학로’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공연장과 음식점, 카페, 레코드점 등이 즐비하다. 그리고 곧 이어 종로3가부터 광화문에 이르는 거리가 펼쳐진다. 그 사이의 종로6가나 종로5가 등은 짤막하고 텅빈 거리다. 이것은 전혀 정확하지 않은 지도지만 서울 사람들은 그런 정확성에 개의치 않는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공연을 보고 식사를 하고 쇼핑을 하고 차를 한 잔 마실 수 있는 문화공간이지 정확한 서울지도가 아니다. 일반인에게 문화공간이 없는 거리는 짤막하고 적막한 거리다. 공간 역시 관심과 문화에 따라 크기가 다르게 느껴진다.

이런 시간과 공간의 관념이 인간을 지배한다. 관리시절 다양한 현지조사연구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 덴버대, 노스웨스턴대 등에서 강의하며 통(通)문화적 커뮤니케이션에 뛰어난 업적을 인정받은 저자는 시간 공간 등의 인식이 이렇게 문화마다 다름을 지적한다.

홀은 인간이 자기 외부의 연장물을 진화시킴으로써 자신의 약점을 보완해 왔고 그것이 바로 문화라고 말한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이 만든 문화의 편리함에 젖어서 어느덧 그 연장물의 속박을 눈치채지 못한 채 문화의 지배를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홀이 시도하는 것은 이 문화의 속박을 푸는 일이다. 자신을 얽어매는 문화적 습관을 읽어내서 새로운 습관으로 개선시킬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소리 없이 우리의 삶 속에 스며 있는 문화를 읽어내야 한다.

홀은 “‘침묵의 언어’는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전달하는 작업이 아니라 일련의 복잡하고 비언어적인, 맥락을 담고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들을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문화는 인간이 만들고 다시 인간에게 부여된 것일 뿐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는 문화 그 자체가 인간이다. 따라서 문화를 읽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문화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흔히 결여되기 쉬운 삶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홀은 충고한다.

그는 언어를 포함한 ‘기본적 의사전달체계’를 10가지로 이야기한다. 상호작용, 연합, 생계, 양성성, 영토권, 시간성, 학습, 놀이, 방어, 개발. 홀은 이런 의사전달체계의 분석을 통해 침묵의 언어를 읽어내서 무의식적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문화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제안한다.

이 책(원제목 The Silent Language·1959)은 홀의 문화인류학 4부작 중 첫째 권. ‘문화를 넘어서(1976)’와 함께 번역 출간됐고, ‘숨겨진 차원(1966)’과 ‘생명의 춤(1983)’도 곧 출간된다. 최효선 옮김 286쪽 1만원.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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