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디지털]프란츠 파농의 '민족주의'

  • 입력 2000년 1월 30일 19시 35분


파농에게.

“흑인도 왼쪽에 심장을 갖고 있다.” 나지막한 신음처럼 당신이 뱉은 말입니다. 그 어떤 절규보다 사람을 처연하게 만드는 말이었습니다. 식민주의의 그 소름끼치는 잔인한 역사가 이 한마디 외침에 압축되어 있더군요. 억압받는 자와 억압하는 자를 동시에 소외시키는 그 비인간적인 역사 말이예요.

백인들의 인종주의가 교묘하게 심어준 흑인들의 자기 모멸과 열패감이란 정말 얼마나 무서운 자기 안의 적이었는지요. 프랑스의 변두리만 다녀와도 우쭐대고 프랑스인보다 더 완벽하게 불어를 구사해야겠다는 원주민 지식청년들의 강박관념, 불평등한 결합을 감내하면서도 백인 남성과의 결혼을 꿈꾸는 젊은 처녀들, 마르세유에 도착하자마자 홍등가로 달려가 백인 창녀를 올라타야만 직성이 풀리는 흑인 청년들의 도착적 열등감….

흑인들의 일상과 의식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한 인종주의의 상처를 그려낸 당신의 글 들은 얼마나 예리한 아픔이었는지요. 식민지 조선인들이 가졌던 ‘엽전의식’이나 19세기 폴란드인들의 민족적 콤플렉스도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피부색이 상징하는 신체적 도식 밑에 숨어 있는 식민주의의 역사적 도식을 예리하게 해부한 것만으로도 제3세계의 민중에게 당신이 남긴 지적 유산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요.

그랬습니다. 식민주의가 식민지 검둥이 지식인인 당신에게 강요하는 소외에 대항하는 처절한 싸움이 곧 당신의 삶 자체가 아니었는지요. 물론 알제리 민족해방운동이 당신만의 외로운 싸움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착취와 모멸의 식민주의 체제의 희생물로 소외된 민중들이 들고 일어난 위대한 싸움이었습니다.

당신을 읽은지 이십 여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기억에 생생한 장면이 있습니다. 해방전선에 참가한 알제리 여성들이 필요에 따라 차도르를 집어던지고 맨살을 드러내는 서구식 원피스를 입으면서 겪는 의식의 해방과정 말입니다. 민족해방과 여성해방의 그 절절한 만남이 준 감동은 지금도 살 떨리는 여진으로 남아 있습니다.

20대 초반의 내게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이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폭력은 정녕 아름다웠습니다. 민족해방전선의 폭력투쟁은 알제리의 민중들에게 식민주의가 강요한 소외에서 벗어나 자아를 회복하고 해방의식을 획득하는 계기였습니다.

당신 말대로 탈식민화의 폭력은 분명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당신을 접한지 20년이 지난 지금 약간의 의구심이 생기는 것을 부정할 길이 없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이야기한 것처럼 수단에 의해 목적이 압도될 위험성이 있다는 식의 원론적인 문제 때문만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알제리가 처한 상황 때문이지요.

민족해방전선에 뿌리를 둔 민족 엘리트들의 독재와 그에 맞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가 첨예하게 맞서 있는 이 상황을 당신이라면 어떻게 설명할는지요.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하나’라는 식의 동일한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은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과정이지요. 잊혀진 민족은 분명 재발견해야 할 진실이었고, 그것은 당대의 역사적 정언명령이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저항민족주의를 뒷받침했던 그 논리가,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민중들에게 획일을 강요하는 강제적 동일성의 대명사가 된 것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왜 잠비아의 카운다(Kenneth Kaunda) 기억하시죠? 범아프리카 민족회의에서 당신도 만나 보았을 거예요.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의 선봉에 섰던 그가 독립국가의 수반이 되더니, 민족 전체의 이익을 위해 임금의 동결과 파업 금지를 선언하더군요. 파업노동자들이 투옥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죠.

기니의 투레(Sekou Toure)는 또 어떻구요. 아프리카 정부에 항의하는 파업은 역사적으로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민족지도자들은 이렇게, 인간적인 삶에 대한 노동자들의 욕구를 민족의 이름으로 간단히 부정들 해버리더군요.

그것은 결국 저마다 다른 삶의 조건들 속에서 나오는 민중들의 다양한 욕구를 국가권력이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동일성 속에 규격화시켜 종속시키는 국가주의로 귀결되지 않았는지요. 비단 알제리뿐 아니라 왜 제3세계의 많은 민족해방운동 세력이 독립 이후엔 곧 독재적 국가권력의 담당세력이 되었는지를 이제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 아닌지요. 결국 민족해방이 민중의 해방이 아니라 국가의 해방 혹은 정부의 해방이라는 논리로 뒤바뀌어 버린 것이지요.

해방 이후 남과 북을 막론하고 한반도의 민족주의도 비슷한 논리적 전도과정을 거친 것 같아요. 민족담론이 권력담론으로 전화하면서 민족주의도 더 이상 해방의 기제가 아니라 억압과 동원의 논리로 탈바꿈한 것이지요.

추상으로서의 민족이 인민을 도구화하고 독재권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결코 당신이 바라던 바가 아니라고 믿어요. 탈식민주의 시대의 민족주의 담론은 이제 더 이상 힘의 논리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논리에 입각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요.

세속적 민족주의가 권력의 논리로 타락했다고 해서, 그에 대항하는 이슬람 근본주의가 반사적으로 정당성을 갖는 것은 아니지요. 그것은 진보적 반서구주의를 가장한 토착적 보수주의의 가장된 형태일 뿐이지요.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는 역사적 명분이 그 보수성을 은폐한 것이지요. 무엇보다도 호메이니의 이슬람혁명이 그 보수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잖아요. 제국주의에 저항한다고 해서 꼭 여성들에게 다시 베일을 뒤집어씌우고 시민적 자유를 억압해야만 하는지요. 그것도 민족의 전통이라고 지켜야만 하나요.

멀리 예를 들 것도 없어요. 민주화에 대한 요구를 주체성을 잃은 서구주의라고 일축해버린 박정희나 당내 개혁을 주장한 개혁파를 사대주의라고 매도해버린 김일성도 같은 코드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한국적’ 민주주의나 ‘우리 식’ 사회주의는 결국 민주주의나 사회주의 안하겠다는 이야기였지요. 그것도 민족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지요.

역사적 조건의 변화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는 분명히 당신과는 다른 문제의식인 것 같아요. 저항민족주의의 빛을 밝히는 작업이 당신의 몫이었다면, 그 그림자를 거두는 것은 남겨진 우리들의 몫이겠지요.

어쩌면 민족주의를 해체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당신의 문제의식을 되살리는 길이 아니겠는지요.

▼키워드-'탈식민화'▼

파농(Frantz Fanon)은 1925년 프랑스 식민지인 서인도제도의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나 1961년 서른여섯의 아까운 나이에 백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안틸레스에서 정신과 의사로 근무했던 그의 관심은 정신분석학뿐 아니라 철학, 문학, 사회과학 등 다방면에 걸쳐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뚜렷한 족적을 님겼다.

오늘날 파농은 흑인의식과 정체성, 흑인 민족주의, 식민주의와 탈식민화, 권력의 지표로서의 언어, 혼혈 등의 다양한 문제들을 개척한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의 이론적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파농과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을 이어주는 고리는 무엇보다도 ‘탈식민’이라는 화두다. 파농은 ‘검은 피부 흰 가면’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등의 저서를 통해 흑인들의 허위의식을 반성하고 식민주의를 비판했다. 그는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폭력투쟁을 통해 원주민들이 백인지배를 정당화하는 인종주의의 억압적 소외를 타파하고 자아를 찾는 해방이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즉 알제리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생생하고 섬세한 묘사를 통해, 탈식민화 과정이야말로 곧 인간해방의 전제임을 분명히 했다. ‘제3세계주의〓파농주의’라는 등식이 통용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실천을 독립을 위한 폭력이라는 좁은 경계 안에 가둠으로써, 해방을 위한 실천은 독립 이후 국가건설 과정에서도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은 경시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제3세계주의의 일반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파농주의 계보▼

파농과 사상적 호흡을 같이 하는 것으로는 먼저 시인이자 세네갈의 대통령이었던 셍고르(Leopold S. Senghor)가 주창한 ‘네그리튀드(Negritude·흑인성)’운동이 있다. 이는 식민주의가 부정한 아프리카의 과거를 복원해 흑인들의 집단적 정체성을 재확인함으로써, 흑인들은 열등하다는 인종주의의 편견을 불식시키려는 운동이었다. 셍고르의 표현을 빌면 “인종은 실체다…(인종 간에) 차이는 있다. 그러나 우열이나 적대감은 없다”는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1920년대 미국 흑인들의 문화운동인 ‘할렘 르네상스’도 파농주의의 원류에 포함될 수 있다. 검은 것이 아름답다는 미국 흑인들의 자각은 곧 인종주의의 폭력에 잔뜩 겁먹고 움추려 순종적이고 비굴한 ‘삼보’의 이미지를 벗고 흑인도 자주적인 인간이라는 당당한 선언이었다. 인종차별에 대해 최초로 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한 두 보이스(W.E.B. Du Bois)도 파농의 선구자라 하겠다.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파농과 동시대의 트리니다드 토바고 출신 제임스(C.L.R. James)도 주목된다. 파농이 식민주의에 대해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했다면 제임스는 인권운동, 인종, 계급, 문화와 스포츠에 대해 유물론적으로 접근했다. 또 파농이 민족해방운동을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 해석하는 제3세계주의의 시각을 견지했다면, 제임스는 맑스주의 패러다임에 입각해 운동 내부의 계급적 이질성, 집단과 개인의 대립 등을 치밀하게 분석했다. 이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파농보다 더 주목해야 할 사상가라 하겠다.

말콤 엑스도 빼놓을 수 없다. 말콤 엑스가 왜 흑인민족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전향하려 했느냐는 문제는 파농주의의 장단점을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데 하나의 준거가 될 수 있다. 파농주의는 사실상 미국의 흑인민족주의로부터 제3세계의 인민주의, 이슬람 민족주의, 모택동주의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지구화 시대에 제3세계주의가 갖는 의미가 과연 무엇이냐’는 성찰 위에서 파농주의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아닐까?

글: 임지현(한양대·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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