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범 代母 윤영지씨 '상처받은 어린영혼' 사랑으로 구원

  • 입력 2000년 1월 12일 19시 02분


윤영지(尹英智·55·여)씨가 살고 있는 집은 서울 여의도의 고층아파트 단지 1층이다. 두겹 세겹의 방범시설로 실내가 안보이는 다른 집과는 달리 윤씨집은 단지내에서 유일하게 베란다에 방범 창살이 없다.

웬만한 동네 사람들은 이 집에 ‘빵잽이’들이 득실거린다는 사실을 다 안다. 92년부터 20여명의 ‘전과자’가 이 집을 거쳐갔다. 그것도 주로 살인 강도 등 강력범죄를 저지른 소년범만 모아두는 천안소년교도소 출신들.

그렇다고 이 집이 범죄자들의 아지트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오히려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눈빛은 한겨울 산사(山寺)의 동자승만큼이나 맑다.

윤씨는 서울 명동에서 25년간 유명 의상실을 운영한 패션디자이너 출신. 남편 이홍균(李弘均·60)씨는 지금도 시내 중심가에서 양복점을 운영 중이고 두 아들 모두 목사의 길을 걸으며 남 부러울 게 없이 생활을 꾸려 가는 단란한 가정이다.

이런 윤씨 가족이 ‘전과자’들과 동거를 시작한 것은 92년초. 우연히 천안소년교도소에서 신학 공부 중인 소년범들의 이야기를 듣고 격려엽서를 보낸 게 계기였다. 전도할 욕심에 매주 한번씩 보내기 시작한 엽서가 소년범들의 입소문을 타고 6개월 만에 수신자를 9명에서 470명으로 늘렸다.

윤씨를 더욱 감동시킨 것은 엽서 보내기 시작한지 8주 만에 처음 날아온 답장. 16살에 살인을 저질렀다는 답장의 주인공은 윤씨의 엽서를 통해 삶의 희망을 되찾게 됐다며 ‘나 같은 사람도 목사가 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상처받은 어린 영혼의 목소리가 170원짜리 엽서와 120원짜리 우표를 합쳐 290원의 작은 투자가 낳은 열매라고는 믿기지 않아 눈물이 났습니다.”

윤씨는 목사의 길을 희망하는 소년범들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먼저 자기 가정의 문을 열기로 결심했고 남편과 두 아들도 그 뜻을 따라주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미움과 원망으로 가득한 그들의 마음과 행동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 만무했다. 집안의 금품이 없어지고 돈 벌 욕심에 공부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동료들과 다투고 밤마다 협박전화를 걸어와 전화번호를 바꾼 적도 있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물건이 없어져도 범인을 추궁하지 않았고 행여 그들이 나쁜 유혹에 빠질까봐 새벽 4시부터 밤 11시까지 빽빽한 하루일과 내내 붙어다녔다. 가출을 할 때면 멀리 제주까지 찾아나서기도 다반사였다.

주위에선 무모하다고 만류하기도 했지만 지난해 드디어 첫 ‘알곡’을 거뒀다. 출소자출신중 한사람이 신학대학원까지 6년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필리핀 벽촌의 선교사로 떠나게 된 것이다. 지금껏 9년간 윤씨 집을 거쳐간 25명 가운데 공부를 포기한 사람은 있어도 재범자는 하나도 없다는 점도 그의 기쁨.

“처음 저를 찾아올 때 살벌하던 저 아이들의 눈빛이 저렇게 맑게 빛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큼 저희 부부에게 큰 선물은 없습니다.”

지금도 10대부터 30대까지의 ‘믿음의 아들’ 5명과 함께 살고 있는 윤씨는 또다른 ‘아들’들을 찾아 전국 2300여명의 재소자들에게 매주 사랑의 엽서를 띄우고 있다. 그의 연락처는 02-844-9605.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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