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배수아 네번째 창작집 '그사람의 첫사랑'

  • 입력 1999년 11월 26일 18시 48분


▼'그사람의 첫사랑' 배수아 지음/생각의나무 펴냄▼

서로 이해하는 듯 하지만 의심하고, 그런 의심까지 포함해 자신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인물들. 감춤과 의심을 거듭하며 균열음을 내는 관계의 위태함.

그러나 그 위기는 폭발하지 않고, 대신 저마다의 속으로 깊어지며, 칼자욱 대신 거칫한 찰과상을 상대의 마음에 입히고…. 파국은 없거나 모호하다. 상처마저 감추어진다.

작가 배수아(34)의 주인공은 대개 그렇다. 단편 ‘차가운 별의 언덕’에서 주인공 부부처럼.

네번째 창작집 ‘그 사람의 첫사랑’ 교정지에 OK 사인을 낸 그를 늦은 밤 만났다.

“모든 사람이 마녀가 되거나 혁명을 하지는 않죠. 미세하게 상대의 마음에 금을 긋고 살아가는 것이 대개의 삶이에요. 모든 접촉은 상처가 되는 거고.”

그는 그 상처입히는 접촉을 받아들이거나, 오히려 지향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사람이고 삶이기에.

‘신세대고, 개인화된 삶을 대변하고, 부르조아적이고….’ 이런저런 공론에 때론 무심하고 때론 눈을 반짝 뜨며 ‘그랬던가요?’ 되물어온 작가. 최근엔 가끔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새 창작집에서는 그의 변화를 묶어 조감해볼 기회가 주어진다.

‘징계위원회’의 주인공은 로비스트의 집요한 공작에 시달려 원치 않은 징계위에 참석하고, ‘은둔하는 북의 사람’에서는 남북간의 타협에 의해 서울로 온 과학자가 양쪽에서 모두 버림받는다.

익명의 기관, 존재이유를 뚜렷이 알 수 없는 제도. 카프카 ‘성’의 K같은 경악의 체험은 아니지만, 주인공들은 그 넘볼 수 없는 거대한 성 앞에서 숨을 멈춘다. 이런 저런 암묵과 눈짓을 통해, 타인들은 쉽게 자신을 감추거나 책임을 포기한다.

“지금까지의 작업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좋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바꾸어볼 때가 되었다는…. 그 시점에 ‘은둔하는 북의 사람’의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것. 많은 단편들에서, 작가가 작품의 문을 닫고 퇴장하려는 그 직전에, 짧은 잠언과 같은 반추상(半抽象)의 언어들이 눈에 들어와 꽂힌다. 때로 그 말은 적막할 만큼 아름답고, 작가가 서두에서부터 달려온 이야기의 비의(秘意)를 섬뜩하게 열어보인다.

‘은둔하는…’에서 거리의 선지자는 “제도나 어떤 개인의 악이 고통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 놓여 있어도 물에게 복종하는 안개처럼 피학은 스스로 가학을 찾아나선다”라고 말한다.

어쩌면, 남모르는 내면의 상실과 결락에 시달리는 그의 주인공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닐지. 혹은 ‘인생은 어느 순간에 붕괴된다’라는 자명한 위협을 모른채 생의 한 순간을 걷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다음주 ‘생각의 나무’에서 출간예정.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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