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독서]'벽초 홍명희연구'/명예-지조의 삶 실천

  • 입력 1999년 11월 12일 18시 29분


'벽초 홍명희연구' 강영주 지음/창작과비평사 펴냄▼

일제 시대 3대 천재로 꼽히는 인물은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1890∼1957),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1892∼1950?),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憙·1888∼1968)다.

앞의 두 사람이 거대한 문학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친일시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고 벽초는 월북문인으로 북한에서 내각부수상이라는 고위직을 지냈다는 이데올로기적 문제로 ‘잊혀진 인물’이었다.

장편소설 ‘임꺽정(林巨正)’ 한 편으로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최고봉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는 벽초.

그의 생애와 사상 전반에 대한 탐구를 통해 재평가를 시도한 연구서가 나왔다. 저자는 86년 박사학위논문인 ‘한국근대역사소설연구’ 이후 10여 년간 홍명희 연구에 전념해 온 상명대 국어교육과 강영주교수. “‘임꺽정’이라는 대작과 해방 후 월북했다는 행적에 가려 그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이뤄지지 못해 왔다”고 발간 이유를 밝혔다.

저자에 따르면 홍명희의 생애와 사상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경술국치에 부친이 자결한 사건이었다.

“나는 ‘임꺽정’을 쓴 작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홍범식의 아들, 애국자다. 일생 동안 애국자라는 그 명예를 잃을까봐 그 명예에 티끌조차 묻을세라 마음을 쓰며 살아왔다.”

말년에 홍명희가 자녀들에게 했다는 이 말은 문학적 성과나 이념에의 헌신에 앞서 그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해 온 삶의 가치가 무엇이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노론(老論) 명문가 출신인 홍명희는 “대의를 위해 목숨을 던질지언정 몸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 지조 중에서도 가장 높은 지조”라며 선비정신을 실천했다. 그는 주위의 끈덕진 권유에도 불구하고 ‘임꺽정’외에 단 한 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을 정도로 문학적으로도 결벽에 가까웠다.

그는 순수문학과 속류, 좌익문학을 모두 비판하며 문학이 ‘인생’과 ‘정치’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문학은 어디까지나 ‘문학을 통해서’ 기여하는 것이며 그 나름의 ‘독자성’을 상실하면 예술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스로는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 문학에 전념할 수 없었음을 아쉬워하면서도 문학보다는 사회참여를 우선시했다.

그는 ‘기성적인 것’과 ‘권위’에 대한 ‘반항정신’의 소유자였다. 장남 기문과 기탄없이 이야기를 하며 담배도 서로 맞대고 피웠고 담배가 떨어지면 서로 달라고 해서 피우기도 했다는 일화는 당시 세간의 화젯거리였다고 한다.

그는 또한 “완전한 합리적 인류사회에는 여자가 남자와 같이 정치적 문화적으로 활동할 균일한 기회를 가질 것”이라고 말하는 등 남녀평등에 대해서도 확고한 소신을 피력했다.

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평가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중간파’ 등으로 다양하다.이에 대해 저자는 홍명희가 좌파와 우파의 민족연합전선인 신간회의 지도자였다는 데 주목한다. 그는 홍명희를 사회주의를 포용할 수 있는 민족주의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평가한다.

이 책으로 홍명희에 대한 재평가를 어느 정도 마무리지은 저자는 이제 소설 ‘임꺽정’에 대한 본격적 재평가 작업을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682쪽 2만9000원.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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