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민 金씨의 금강산 가상관광기]『아! 꿈이런가』

  • 입력 1998년 6월 24일 19시 55분


‘드디어 가는구나. 고향 마을을 먼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어야 할텐데….’

금강산 유람선이 첫 출항하는 10월 어느날. 갑판에 선 실향민 김모씨(71)는 환송나온 아내와 자식들에게 손을 흔들면서도 마음은 이미 고향마을로 달려가 있었다.

김씨의 고향은 휴전선 바로 북쪽인 강원 고성군 외금강면 온정리. 금강산 자락에 안겨 있다. 그러나 20대 초에 철조망을 넘어 남쪽으로 피란온 뒤로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 고향을 떠나온지 꼭 50년만이다.

추첨으로 유람선 1호 승객에 뽑혀 마침내 배를 타게 됐을 때부터 그의 마음은 아이처럼 흥분됐다.

‘고향엔 못가지만 금강산에 오르면 우리 마을 내음이라도 맡아볼 수 있겠지.’ 그런 기대로 이날을 손꼽아 기다려 왔다.

속초항을 빠져나온 유람선은 서서히 북녘을 향해 나아갔다. 1시간여동안 빠른 속력으로 달리던 배는 어느 순간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휴전선을 넘었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는 순간 창밖으로 들어오는 해금강의 기암괴석들.

“아! 어디를 봐도 아련히 눈에 익은 고향 부근의 풍경들.”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 탄성이 터져나왔다.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고향생각이 날 때마다 통일전망대에 오르면 어렴풋이 그 끝자락이 보이던 해금강. 삼일포 연화대 단서암 등 절경이 바로 손에 잡힐 듯 눈앞을 지나갔다.

저녁 무렵 배는 장전항 앞바다에 도착했다. 북한 해역에서의 첫날밤. 자는 듯 마는 듯 뒤척이다 어느 새 날이 밝았다.

금강산 유람이 시작됐다. 장전항엔 접안시설이 안돼 있어 작은 배로 옮겨 타야 했다. 금강산은 학창시절 1년에 두번씩 소풍을 가던, 마을 동산 같은 산이었다.

예전에는 금강산에 가려면 장전에서 외금강역으로 기차를 타고 갔는데 이제는 버스로 가야 한다고 한다.

외금강역까지는 10㎞. 10분여 그 거리를 달리는 동안 김씨는 한마디 말도 없었다.

‘외금강역에서 조금만 옆으로 가면 고향인데…. 나 혼자 잠깐이라도 갔다올 순 없을까.’

불가능한 상상을 하며 그는 버스 차창 밖만 뚫어지게 내다봤다. 혹시라도 어릴 적 친구라도 지나가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외금강역에 도착하자 외금강 온천이니 닭알바위니 관음폭포니 하는 낯익은 팻말들이 보였다.

아홉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두었다는 구선봉의 낙타등 같은 모습이며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서린 감호호수, 웅장한 비봉폭포, 선하계, 삼선암…. 그리고 온 산을 태울 듯한 붉은 단풍. 바로 ‘금강산의 가을’이었다.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수정처럼 맑은 물을 한모금 들이켜자 가슴이 쏴 했다.

그 다음날은 외금강보다 더 안쪽인 장안사역으로 가서 내금강쪽을 올랐다. 붉은 단풍으로 물든 만폭동과 보덕암.

금강산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계곡들이 펼쳐졌다. 멀리 채하봉 비로봉이 구름에 싸여 신비로운 자태를 드러냈다.

내외국인들이 뒤섞인 일행들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금강산의 절경에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둘째날은 금강산 북쪽에 위치한 총석정과 시중호. 바닷가에 1㎞에 걸쳐 우뚝 우뚝 솟아있는 6각형 돌기둥 무리들.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으뜸으로 선비들이 즐겨찾던 절경 중의 절경.

셋째날은 원산 남동쪽 4㎞에 위치한 명사십리. 초등학교 시절 기차를 타고 소풍왔던 천혜의 해수욕장이다.

마지막날 밤.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승객들이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배안은 온통 떠들썩하지만 객실 침대에 누운 김씨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이곳에 오면 고향 생각이 덜 날까 싶었는데. 지척에 두고도 못가니 더 못견디겠구마. 이럴줄 알았으면 내 차라리 오지를 말걸….’

김씨의 베갯머리가 금세 흥건해졌다.

〈이명재기자〉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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