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들,실직 아들 걱정 『설쇠는 기분도 안난다』

입력 1998-01-26 18:30수정 2009-09-25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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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이 힘겨워할수록 부모는 더 강해진다.’

기업도산 명예퇴직이 휩쓰는 경제난 속에 쓰라린 가슴으로 설을 맞는 고향의 부모님들. 올해는 아예 자식들에게 정성을 다하는 명절로 삼고 있다.

25일 광주 고속버스터미널. 자녀들과 함께 설을 쇠기 위해 이모씨(71·여)는 정성스레 담근 청국장을 들고 서울행버스에 올랐다.

11년전 남편과 사별한 뒤 명절 때마다 서울에서 5형제가 손자 손녀들을 앞세우고 대문을 들어서는 모습을 가장 큰 낙으로 삼아온 그였다.

“집마다 차비만 해도 30만원씩은 들텐데…. 나 하나 올라가면 될 것을….”

진작부터 모시겠다는 큰아들의 간청을 “고층아파트는 왠지 현기증이 나서 무섭다”며 못들은 척했던 고집도 이번에는 꺾고 큰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참에 제사도 아예 옮기자꾸나.”

대구의 이모씨(63)부부는 며칠전 은행에 가서 그동안 여유있을 때마다 모아둔 3백만원을 찾았다. 부산의 모건설사에서 8년간 근무하다 최근 실직한 큰아들 가족이 설을 쇠고 돌아갈 때 며느리 손에 쥐어주기 위해서다.

전남 광주시에 사는 박모씨(65)는 함께 살던 큰아들 내외가 3개월전 부도를 내고 잠적했다. 박씨는 아들내외가 이번 설에는 한번 들르거나 전화연락을 해 올 것으로 기대하면서 늘상 문을 열어두고 전화벨 소리가 울릴 때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전북 전주시에 사는 이모씨(68)는 가족간 화목이 올 설의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큰아들이 유통업을 하다 망하는 바람에 3남2녀인 자녀들이 모두 연대보증을 섰다가 1억∼2억원대의 돈을 물어야 할 형편에 처했기 때문이다. 아파트를 처분하고 전셋집으로 이사한 셋아들을 포함, 형제들이 한결같이 큰형을 원망하며 설에도 고향에 오지 않겠다고 버텼으나 이씨의 간곡한 설득으로 맘을 바꿨다.

“설날 저녁에 술상을 놓고 ‘한마디’해 줄 생각입니다. 없을수록 중요한 것은 가족간의 믿음과 사랑 뿐이라고요. 일제시대와 6.25때도 그런 믿음 하나로 모든 것을 이겨냈습니다.”

〈김경달·윤종구·박정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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