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관계 기본틀,「열린 공간」이 사회 창조한다

  • 입력 1997년 12월 20일 08시 07분


「공간에 대한 지배가 사회적 권력의 원천이다」 「인류의 역사는 공간투쟁의 역사다」. 프랑스의 도시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를 필두로 한 공간담론 주창자들은 더이상 공간을 그저 인간의 삶을 둘러싼 들러리가 아니라고 한다. 이들은 공간이 인간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소이며 따라서 특정한 공간은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일상속에서 인간의 시야와 움직임을 제약하는 것으로 포착한다. 공간은 이제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자 동시에 사회적 과정과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는 역동적 대상. 이같은 입장은 카를 마르크스가 인류의 역사를 과거부터 현재까지 발전단계별로 나누는 등 「시간」범주를 중시한 것과 커다란 차이를 보여준다. 근대 지배적 담론이었던 시간과 역사에 가려져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왔던 「공간」에 대한 복권이다. 그간 공간은 선험 철학과 유클리드 기하학의 범주로 획일적이고 고정된 것으로만 인식됐다. 공간을 가지고서는 진보와 변혁을 얘기할 수 없다는 암묵적 합의같은 것이 학문 세계를 흘러왔다. 르페브르에 따르면 공간은 정치적이고 전략적이며 자본주의의 낙인이 찍혀있다. 도시 및 주거 공간은 완전히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와 달리 자본주의 사회의 다른 상품처럼 의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는 사회 자체가 「공간적으로」 생산되는 점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민주주의란 새로운 제도 역시 그것이 실현될 수 있는 「열린 대화의 공간」을 전제로 한다는 것. 또 다른 예로 사회주의권이 몰락한 것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스스로 이전 체제와 구별되는 독특한 도시나 건축양식 등 그들의 체제에 적합한 새로운 공간을 만들지 못했던 것에 큰 원인이 있다고 본다. 미국의 도시사회학자 에드워드 소자와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도 사회이론의 핵심개념으로 공간의 재정립을 시도하고 있다. 공간담론을 제기하는 논자들의 공통적인 입장은 공간이 삶의 가장 기본적 형식이라는 것. 이에 따라 공간은 인간의 행위와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분석틀이 된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분석을 통해 잘 드러난다. 19세기 산업혁명과 그에 따른 도시로의 인구집중 및 시가지 팽창은 이전의 방사형 대신 블록으로 나눠지는 격자형 도시계획과 대중 교통체계의 발전을 가져왔다. 메트로폴리스 메갈로폴리스 등 20세기 대중 소비사회의 대도시들은 공간에 대한 대자본의 지배가 본격화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공간을 효율과 이익의 기준으로만 이용하려는 자본의 논리가 반영돼 있다. 이에 비해 15∼16세기 중세 도시공간은 지금처럼 자연에 대한 완벽한 파괴가 아니라 농촌과 도시의 유기적 결합체였다. 주거공간의 경우에도 당시 주택은 하나의 홀에서 온 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속에서 개인의 사생활은 전혀 보장되지 않았고 각 가구는 개방돼 한 마을이 결속된 공동체를 형성했다. 상업자본의 주역인 부르주아지가 등장하는 17세기 바로크시대에 이르러서야 오늘날과 같은 주거양식이 터를 잡기 시작했다. 주거와 일터, 개인과 공동체, 남자와 여자, 어른과 어린이, 주인과 하인의 공간이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나눠지기 시작한 것. 이러한 공간에 대한 관심은 「합의에 바탕하지 않은 공간의 폭력적 이용」과 그에 의한 「공간의 탈인간화」에 대한 저항의식에 기반한다. 공간담론은 인간적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인 셈. 최근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20세기 근대 건축운동은 획일적 인간관을 바탕으로 「평균적 인간을 위한 평균적 건축」을 추구해 왔다. 도시가 표준화 규격화를 지향하는 근대적 질서로 재편된 결과 공간이 크기 층수 호수에 의해서만 구분됐다. 당연히 공동체적 삶의 공간이 들어설 여지는 사라졌다. 이는 2차대전 이후 서구에서 확산된 아파트 등 대규모 주거단지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공간에 대한 이러한 이용방식에의 비판은 60년대부터 이미 시작된 후 70년대 활발한 이론적 검토에 힘입어 최근 조형환경운동 등 커다란 흐름을 이루고 있다. 대도시내 보행자를 위한 전용 공간 및 녹지휴식 공간 확보운동, 마을 등의 전통공간을 도시내에 복원하려는 시도, 그리고 공동체와 사생활이 조화되는 저층형 고밀도 집합주택의 건설 등이 그것이다. 91년부터 99년을 기한으로 매년 세계적 학자들이 모여 토론을 벌이는 「애니콘퍼런스」는 공간에 대한 재조명의 대표적 사례. 특히 95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애니플레이스」라는 이름으로 모인 프랑스 사상가 자크 데리다와 질 들뢰즈, 미국의 하비 등 철학 사회학 역사학자 등과 건축가들은 공간이용과 관련한 치열한 고민을 나눈 바 있다. 국내에서도 공간담론은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지리학 도시공학 사회학계를 중심으로 서울을 비롯한 도시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서울사회과학연구소의 임동근연구원(도시공학)은 『동질적 공간개념으로 동시대의 다양한 공간을 설명하는 것이 한계를 드러내면서 공간담론이 각광을 받고 있다』고 설명한다. 임연구원은 특히 신도시 어린이들의 사회화 과정에서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는 것에 주목한다. 즉 중산층이 절대 다수를 구성하는 신도시의 어린이는 주체 형성기에 다른 계층의 구성원을 접하지 못함으로써 이후 만나게 될 다른 계층 사람들과의 관계 정립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분석한다. 「걷고 싶은 도시만들기 시민연대」(사무총장 최정한·崔廷漢) 등 시민단체들도 「시청앞 광장을 보행자 광장으로」라는 캠페인을 벌이며 인간을 위한 공간 확보 운동을 펼치고 있다. 여기서 교통 수단과 매스미디어의 발달에 따른 시간 및 공간적 장벽의 붕괴, 그리고 컴퓨터를 통한 사이버 공간의 등장은 공간담론의 분석대상을 물리적 차원 이상으로 확장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정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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