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동아신춘문예/단편소설당선작]「전갈은 어디로…」②

  • 입력 1996년 12월 31일 18시 24분


나는 아이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갔다. 아이들이 부모의 손을 잡고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며 어둡고 습한 지하방에서 헤엄쳐 다닐 금붕어를 생각했다. 시골집을 떠나와 혼자 살기 시작한 이후 무엇도 내 손으로 길러본 적이 없었다. 살아있는 목숨을 이어가게 해주는 일에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는 얼마나 많은 식물들의 목숨을 자식처럼 보살펴 주었던가. 시골집에서 나는 아버지의 식물들과 함께 자라났다. 마당의 나무들이 꽃이파리를 벌릴 때면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꽃나무 사이를 걸어다녔다. 아버지와 내가 걷던 마당에는 철쭉이 송이째 툭툭 떨어져 있었다. 줄을 따라 발걸음을 앞으로 옮기다가 창살에 갇혀있는 커다란 닭을 보았다. 투계였다. 적의와 승부욕을 가진 싸움닭. 그러나 창살에 갇힌 투계는 병들어 있었다. 등에 돋았던 털이 듬성듬성 빠져나가 허연 등살이 그대로 내보였다. 저 닭은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싸움을 벌였던 것일까.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깃을 치며 소리지르고 싸우는 일에 투계는 지친 듯이 보였다. 병든 투계 옆에 있는 창살 우리에는 다른 한마리의 투계가 있었다. 크고 튼튼한 발로 우뚝 버티고 서 있는 젊은 투계였다. 투계는 부리부리한 눈을 치켜들고 주위를 훑어보고 있었다. 상처와 병으로 더 이상 싸우지 못하게 될 때까지 그치지 않을 것 같은 적의에 찬 눈빛이었다. 그러나 늙고 병 들어도 사람들은 투계를 싸움에서 놓아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치러야 하는 끊임없는 싸움은 죽을 때까지 겪어야 하는 일이었다. 시골집에서 큰오빠는 아버지와 엄마, 나를 향해 적의를 드러냈다. 나는 큰오빠가 소리지르는 말들을 고스란히 들었다. 이 집을 나가버릴 거야. 아버지도 새엄마도 다 필요없어. 큰오빠가 지르는 소리를 들으며 엄마는 우물가에서 묵묵히 빨래를 했고, 아버지는 사각종이에 담배를 말았다. 불쌍한 자식, 내 잘못이 크다. 아버지는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큰오빠의 신경질이 늘어갈수록 아버지는 더 묵묵히 나무를 돌보았다. 나무는 말없이 잘 자라주는 아버지의 자식이었다. 가끔 아버지와 큰오빠가 심하게 다투는 일이 있었다. 큰오빠가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당신이 뭔데. 엄마 없이 키울 거면 날 뭐하러 낳았어. 그러자 아버지는 빗자루로 큰오빠의 등을 사정없이 내리쳤고 큰오빠는 아버지를 함부로 밀쳐냈다. 제발 그만해요! 엄마는 방문 앞에서 소리를 질렀다. 나는 마당에 서서 겁먹은 눈으로 아버지와 큰오빠의 몸싸움을 지켜보았다. 엄마는 아버지의 둘째 아내였다. 괄괄하고 손이 큰 첫째 아내였던 여자는 답답한 농사일 대신 도시에 올라가 다른 일을 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평생 흙을 만지며 시골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엄마는 아버지가 첫째 아내와의 불화로 힘들어 할 때 만난 여자였다. 엄마는 남편을 사고로 잃은 뒤 읍내에 식당을 차리고 혼자서 장사를 했다. 아버지는 비료나 해충약을 사러 읍내에 다니다가 엄마를 알게 되었다. 엄마는 첫째 아내와는 달리 조근조근하고 말이 없는 여자였다. 아버지는 읍내에 갈 때마다 엄마가 있는 식당에 들렀다. 기어이 도시로 올라가 살겠다는 첫째 아내에게 아버지는 논 몇 마지기를 팔아 주었다. 큰오빠는 아버지가 키우기로 했다. 첫째 아내가 도시로 올라가자 아버지는 엄마를 데려와 같이 살게 되었다. 큰오빠는 친엄마가 집을 나간 것이 새엄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큰오빠를 떳떳하게 혼내거나 나무라지 못했다. 아버지와 살게 된 지 두 해 지나 엄마는 나를 낳았다. 아버지는 뒤늦게 얻은 나를 손수 씻겨주고 한 이불속에서 데리고 잤다. 큰오빠는 나보다 열한살 위였다. 나는 나보다 나이가 한참 위인 오빠를 큰오빠라고 불렀다. 큰오빠는 나를 못마땅해했다. 언젠가 쥐불놀이에 쓸 깡통을 만들어 달라고 조르는 내게 큰오빠는 내뱉듯 말했다. 여긴 니네 집이 아니야, 알아? 아무데서나 떼 쓰지 말라구. 큰오빠의 말투는 섬뜩했다. 큰오빠가 방으로 들어가자 나는 연장함에서 못과 망치를 꺼냈다. 깡통이 찌그러지지 않도록 돌멩이를 채워 넣고 못으로 구멍을 뚫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구멍이 반듯하게 뚫린 깡통을 만들기 위해 해가 저물 때까지 망치질을 했다. 망치에 찍힌 손가락이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밤이 되자 쥐불놀이를 시작한 아이들의 함성 소리가 들렸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울상을 짓고 있는 내게 짚을 여러 단으로 묶어 주었다. 나는 짚단을 안고 아이들이 쥐불놀이를 하고 있는 다리로 달려갔다. 짚단에 불을 붙여 돌리자 커다란 불이 어두운 허공에 휙휙 원을 그렸다. 큰오빠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여긴 니네집이 아니야. 나는 손 아래까지 불길이 번져오른 짚단을 냇가로 힘껏 내던졌다. 새 짚단에 불을붙여돌릴때도 큰오빠의 말은 지워지지 않았다. 스물아홉이 된 큰오빠가 결혼을 하던 날, 오빠의 친엄마를 처음으로 보았다. 모진 세월을 독하게 살아온 사람의 표정이 배어있는 얼굴이었다. 예식이 끝나고 가족사진을 촬영할 때가 되자 친척들과 식구들은 단 앞으로 나갔다. 그때 나는 큰오빠의 엄마가 재빠른 걸음으로 오빠의 옆자리에 가서 서는 것을 보았다. 엄마는 걸음을 주춤하다가 두번째 줄에 가서 섰다. 가족사진에 있는 엄마는 큰오빠의 뒤편에서 카메라를 향해 희미하게 웃고 있다. 나는 웃고 있는 사진 속의 엄마를 향해 묻고 싶다. 엄만 어떻게 견뎌내고 있지요? 분노와 상처의 날들을 견디게 해줄 정제된 독이 엄마에게 있나요? 비닐로 만든 넓은 원통엔 셀 수 없이 많은 금붕어가 헤엄치고 있었다. 금붕어를 나누어 주는 남자가 내게 그 중 두 마리를 건져내어 비닐에 담아주었다.비닐봉지는묵직했다. 봉지에담긴금붕어를들여다 보았다. 이제 내가 너희의 작은 내장과 아가미를 돌보아야 하는구나. 병원에 다녀온 주의 토요일, 회사에 월차를 내고 시골집에 내려갔다. 아버지는 묵묵히 나무를 돌보고 계셨다. 나이가 들어 할 수 없게 된 농사일은 다른 사람들이 맡아서 짓고 있었다. 집 입구의 전나무밭을 지나며 아버지를 보면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를 생각했다. 억지로 게워냈던 토사물이 아무 때나 불쑥불쑥 떠오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목구멍으로 쓴물이 올라왔다. 아버지, 저를 숨겨주세요. 나는 아버지에게 간청하고 싶었다. 아버지의 말없는 자식인 꽃나무나 전나무가 되어 땅 속에 뿌리를 내리고 아버지가 돌보는 대로 살고 싶었다. 아버지는 마루에 앉아 마당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 저 왔어요. 나는 아버지 앞에 서서 말했다. 아버지는 손짓을 해 나를 가까이 앉게 했다. 이번주나 다음주쯤에 네가 내려올 거라고 생각했다. 꿈에 자꾸 네가 비치더구나. 어떤 꿈이었는데요? 어린 네가 흙 묻은 몸으로 저기 수돗가 앞에 앉아있더라. 흙덩이가 묻은 몸을 자꾸 손으로 비비는데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가 않는다며 울고 있더구나. 네가 어렸을 적에 애비가 목욕시켜 주었던 것 기억나냐? 네가 열살이 될 때까지 저 수돗가에서 애비가 네 몸을 씻어주곤 했었다. 그런데 꿈에선 네 몸이 흙탕물로 얼룩져 있는데도 다가가 씻어주지를 못했다. 아버지는 내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무슨 일이 있냐? 아뇨, 아무 일도 없어요. 그냥 집에 오고 싶었어요. 나는 아버지를 향해 여리게 웃었다. 아버지는 기운이 없어 보였다. 내가 걱정하는 말을 비치자 아무렇지도 않다며 손을 저으셨다. 엄마는 텃밭에서 돌아와 나를 보자 꺼칠한 손으로 내 손등을 쓸었다. 그을린 손에힘줄이도드라져있었다. 아버지 몸이 예전같지 않으셔서 걱정이다. 통 말이 없으신 분이 머리가 지끈거린단 말을 자주 하시는구나. 저녁상에 놓을 깻잎을 뜯으며 엄마는 말했다. 나는 마루에 있는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는 두 손으로 마루를 짚은 채 마당을 보며 힘없이 앉아계셨다. 허연 머리칼이 오랫동안 버려둔 방의 먼지처럼 아버지 머리를 덮고 있었다. 아버지와 엄마와 함께 마루에 둥근 상을 놓고 앉아 저녁을 먹으며 아들을 낳은 점방집 딸 이야기와 선뜻 받아주는 자식이 없어 다시 시골로 내려온 감나무집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루살이가 떼를 지어 몰려다니고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하고 편안한 밤이었다. 내게 일어났던 일들이 아주 오래 전의 일인 듯 멀게 느껴졌다. 나는 마루에서 가까운 곳에 터를 잡고 땅에 다리를 파묻고서 아버지와 엄마의 나직한 말소리를 분별하며 사는 식물이 되고 싶었다. 살면서 다가올 크고 작은 고통을 뚫고 나갈 힘도, 삶을 견디게 해줄 독을 스스로 키워낼 힘도 내게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도시로 올라와 환풍기 돌아가는 지하의 습한 방으로 돌아왔다. 금붕어가 든 비닐봉지를 들고 공원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일본원숭이 한쌍이 사람들의 짓궂은 호기심에 화가 났는지 우리 안을 뛰어다니며 날카롭게 소리를 질러댔다. 아이들은 원숭이의 반응을 재미있어 하며 혀를 내밀기도 하고 비스킷을 들고 약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자 박람회장 질서를 정리하는 아르바이트생이 다가와 주의를 주었다. 동물우리를 만지거나 괴롭히지 말아주세요. 동물들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은 되풀이해서 말했다. 스트레스라니. 나는 그 말이 색소를 잔뜩 들인 얼음과자나 파랗고 노란 안개꽃의 인위적인 색깔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파충류관을 지나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보았다.유리상자앞에 사람들이 서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요? 나는 한 여자를 붙잡고 물었다. 전갈이, 없어졌어요. 여자는 잠시 사이를 두고 끊어서 말했다. 여자가 말을 끊는 사이 전갈이 가늘고 긴꼬리의 독침을 서서히 치켜 올리는 모습이 잠깐 떠올랐다 사라졌다. 아까 여기에 있었는데 없어요. 여자는 유리상자를 가리켰다. 전갈. 나는 중얼거렸다. 유리상자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전갈이 정말 여기에 있었대요? 옆에 서 있던 아이 엄마가 나를 보며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모르겠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몇 시간 전 이곳을 지나며 보았던 것은 정말 전갈이었을까. 전갈은 분명히 유리상자 안에서 딱딱한 몸을 빛내며 웅크리고 있었다. 다시 허벅지 사이로 날카로운 통증이 짧게 훑고 지나갔다. 아앗, 작게 소리를 내뱉으며 주저앉았다. 왜 그래요? 괜찮아요? 아이 엄마가 놀란 눈을 치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이 재빠르게 내 발 주위를 훑었다. 괜찮아요, 그리고 고개를 들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전갈 따윈 이곳에 없었어요. 아이 엄마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나를 보더니 아이의 손을 끌고 사람들 틈을 황급히 빠져나갔다. 몰려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며 흩어졌다. 웅크리고 앉은 채 고개를 들어 텅 빈 유리상자를 바라보았다. 검고 딱딱한 몸통에 괴어있는강한신경독. 전갈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시골집에 다녀온 며칠 후 꿈에서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와 나는 끝이 보이지 않게 펼쳐진 길을 걷고 있었다. 길 양켠에는 커다란 사철나무와 꽃나무가 서 있었다. 아버지가 키운 나무가 벌써 저만큼 자라났어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무들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아버지와 내가 지나온 길의 어디쯤에선가 새소리가 들려와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 보세요. 나는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갑자기 벚꽃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아주 희미한 분홍빛이 섞인 작은 꽃이파리가 눈앞을 꽉 메워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를 불러 보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빈 방에서 깨어났을 때와 같은 막막함이 가슴을 메웠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 눈을 뜨고 한동안 누워 있었다. 꿈에서 느꼈던 막막함이 채 가시지 않고 가슴을 답답하게 짓눌렀다. 그날 오전, 엄마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엄마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눈 앞으로 꿈에서 보았던 벚꽃이 우우 몰려들었다 사라졌다. 아버지는 꽃밭에 몸을 웅크린 채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빳빳하게 굳은 아버지의 몸이 주물러도 주물러도 펴지지 않았다고 엄마는 읍내의 병원에서 내게 말했다. 몸이 허약해진데다 땡볕이 내리쬐는 마당에 오랜 시간 나가 있었던 게 화근이었다. 아버지는 병실에 누워 경직된 근육이 덜 풀린 얼굴로 나를 보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괜찮다, 괜찮다. 아버지는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힘들여 말했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각오를 하고 계셔야 합니다. 의사는 엄마와 내게 말했다. 나는 회사에 휴가를 내고 일주일간 병원에 머물러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아버지는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몸을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행동이 눈에 띄게 느려진 채였다. 이런 때일수록 맘을 독하게 먹어야 한다. 엄마는 자신에게 말하듯 도시로 올라가는 내게 되풀이해서 말했다. 맘을 독하게 먹어야 한다. 나는 자취방의 환풍기 아래에서 그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얼마나 많은 상처가 삶의 곳곳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걸까. 나는 모진 생을 견뎌내기 위해 스스로 독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깊게 팬 상처와 내뱉지 않은 말들이 모여 만들어 낼 얼음처럼 차고 빛나는 독. 단단하게 굳어진 상처의 조직액에서 모아지는 정제된 한방울의 독. 그 독이 내게 어두운 입을 벌리고 서 있는 삶의 나날들을 지나갈 힘을 줄 것이다. 공원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한산해졌다. 나는 느린 걸음으로 공원을 걸었다. 해질 시간이 되자 쌀쌀한 바람이 넓은 공원을 빠르게 헤집고 다녔다. 잔디밭 옆을 지날때 잔디 밟히는 듯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사각사각. 소리는 아주 순간적으로 귀에 닿았다 사라졌다. 잔디밭에 쳐놓은 줄을 넘어 들어갔다. 무슨 소리였을까 살피고 있을 때 등뒤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거기 들어가면 안 됩니다. 빨리 나오세요. 공원 관리인이 인상을 구긴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줄을 넘어 밖으로 나왔다. 들어가지 말라는 글씨가 안 보입니까. 관리인이 손에 호루라기를 들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요. 나는 잔디밭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관리인은 호루라기를 들고 있던 손을 내리고 잔디밭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바람이 낮게 내려와 종아리 부근을 훑고 지나갔다. 짧은 잔디 이파리가 파라락 흔들렸다. 전갈이, 사라졌대요. 어디로 간 걸까요. 무심코 중얼거린 말은 내 귀에도 낯설게 들렸다. 관리인은 내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치뜨더니 곧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데다옮겨놓은걸거요.종종 그런 일이 있으니까. 독을 가진 동물을 누가 건드리기라도 한답디까. 그렇겠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독을 가진 동물은 누구도 쉽사리 건드리지 않는 법이니까. 제 스스로 미끈거리는 유리벽을 올라 밀봉된 뚜껑을 열고 나오기 전까지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나는 방금 전 짧게 귀에 닿았다가 사라진 소리를 떠올렸다. 사각사각. 그건 단지 바람에 잔디가 쓸리는 소리였을까. 전시회장의 관람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동물우리를 기웃거리던 사람들이 공원 후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느긋하던 사람들의 몸짓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나는 자리에 멈추어 서서 듬성듬성 놓인 동물우리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모두 다 빠져나가고 날이 어둑해지면 이제 동물들은 주인에게로 돌아가 우리안에 몸을 웅크리고서 검고 깊은 어둠이 빠르게 땅위로 내려덮이는 것을 볼 것이다. 그때쯤이면 연둣빛 몸의 가느다란 뱀도 움직임을 멈추고 어둠의 한 방향을 향해 몸을 둥글게 말고, 전갈은 굳어 있던 몸을풀고 움직이기 시작할것이다. 스피커의 안내방송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 공원을 빠져나왔다. 바람이 서늘하게 목덜미에 와 닿았다. 공원을 빠져나온 사람들은 각자 어디론가 빠르게 흩어져 갔다. 나는 넓은 플라타너스 이파리들이 깔린 보도블록을 걸어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정류장에는 사람들이 우리 안의 동물들처럼 드문드문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도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품고 있지 않은 허한 표정이었다. 저들도 제 속에 간직할 정제된 독을 꿈꾸고 있을까. 고대의 연금사들이 주석과 금을 제조해내듯 상처의 조직액을 모아 정제된 한방울의 독을 만들어 내고 싶어할까. 나는 내 속에 살고 있는 상처의 자리와 오래 묵은 말들을 들여다 보았다. 그것들이 잠시 출렁이며 흔들렸다. 괜찮아, 조금만 기다리면 돼. 나는 내 속의 출렁임을 향해 가만히 중얼거렸다.<끝>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