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2월 마지막 저녁에
안도현
1996년 12월의 마지막 저녁에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한 해 동안 수고했노라고,
늦은 귀가를 서두르는 가장들의 어깨 위에
꽃다발을 걸어 줄 것인가
정말 잘 참고 견뎌냈다고,
살다 보면 더 좋은 날이 오지 않겠느냐고,
그 처진 어깨를 감싸안고
국밥 집에서 같이 소주라도 마실 것인가
아니면, 되는 일 하나 없이 세월이 갔노라고,
이대로는 안된다고,
어두운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잡고
밤새도록 고함이나 지를 것인가
흰 눈 뒤집어 쓴 응달의 소나무야,
육십촉 알전구를 켠 해변의 횟집들아,
파업의 불을 지핀 공장의 굴뚝들아,
창문마다 어둠을 붙이고 달리는 도시의 지하철아,
속으로 울며 가는 우리 나라 모든 푸른 강들아,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1996년 12월의 마지막 저녁에
세 끼 밥 굶지 않아도 배가 고프고
지붕에 비 새지 않아도 등이 시리다
기다려도 희망은 나를 데려 가지 않고
기다리지 않아도 절망은 나를 따라 온다
가진 게 많은 이들은 줄 것이 없다고 하고
가진 게 없는 이들은 줄 것이 없어 마음 아프다
1996년 12월의 마지막 저녁에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데뷔
△시집 「그대에게 가는 길」 소설 「연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