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 보디­…월드컵스타들 혼성이미지 화제

  • 입력 2002년 6월 20일 16시 20분


광고속의 안정환-포효하는 안정환
광고속의 안정환-포효하는 안정환

《베컴의 키스는 뜨거웠다. 15일 잉글랜드와 덴마크의 16강전. 수비수 리오 퍼디낸드가 첫 골을 터뜨린 후, 잉글랜드팀 주장 데이비드 베컴은 그의 뺨에 키스를 퍼부었다. '원더보이' 마이클 오언이 두번째 골을 터뜨렸을 때는 땀과 비로 헝클어진 오언의 금빛 머리카락을 한손에 움켜쥔 채 무언가를 속삭이듯 침착하고 뜨겁게 그의 귓볼에 입맞추었다.

공을 쫓아 달리는 사내들의 땀, 거친 호흡, 쏟아지는 비, 관중석의 함성까지 한순간에 정지화면으로 멈춰버린 듯했던 에로틱한 골 세러머니. "베컴은 게이"라는 소문을 공개확인아라도 하는 듯했다. 그렇다한들 어떠리. '신의 발을 가진 남자' 베컴 자신이 "나의 아이콘은 게이다. 난 그 사실이 자랑스럽다"는데….》

*하이브리드 영웅들의 축제

2002년 한일월드컵은 아름다운 혼성(hybrid) 영웅들의 향연이다. 베컴만이 아니다. 일찍 퇴장한 프랑스의 지네딘 지단, 아르헨티나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한국의 안정환도 그 대열에 우뚝 서 있다.

지단

‘웃음’을 금지당한 금욕의 수도사처럼 카메라 앞에서 어정쩡한 미소만 짓는 지단. 그러나 그라운드에서는 장애물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넘어뛰는 혈통 좋은 종마다. 그럼에도 수도승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의 머리 가운데가 비어서가 아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그의 표정에서 ‘진지’ ‘몰입’ 이상의 다른 감정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검은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달렸던 바티스투타는 체 게바라와 예수의 혼성 이미지다. 그것도 예루살렘의 성전을 더럽히는 장사꾼들을 채찍질로 몰아내던 ‘성난’ 예수다. 아르헨티나팀의 미드필더 후안 베론이 가슴에 문신했다는 남미의 혁명투사 체 게바라. 그의 커다란 얼굴 초상은 아르헨티나팀 경기마다 응원석에 내걸렸지만 정작 베론보다는 긴 머리의 바티스투타가 더 체 게바라와 오버랩됐다. 이번 월드컵을 끝으로 대표팀 은퇴가 기정사실이었기에 도탄에 빠져 있는 조국에 기쁨을 주기 위해 더 투혼을 불살랐던 바티스투타. 열정이 불발로 끝났다는 점에서 비극적 카리스마인 체 게바라와 운명을 함께했다.

바티스투타

이탈리아전에서 황금의 역전골을 터뜨린 뒤 왼손 검지를 치켜들고 소리치며 달리던 순간의 안정환은 ‘포효하는 남자’였다. 그러나 웬만한 여자보다 더 작은 얼굴, 눈 코 입매가 뚜렷하되 선이 고운 그의 모습은 ‘근육질’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99년부터 그를 전속모델로 기용해온 소망화장품의 강호실 대리는 안정환의 광고 이미지 설정에 관해 “저토록 씩씩한 남자가 저렇게 부드러울 수 있다는 극단적 양면성의 공존”이라고 설명했다.

‘남성적이면서 여성적인’ 베컴의 이미지는 조작된 것만이 아니다. 스스로 혼성육체의 아이덴터티를 추구한다. 긴 스커트 모양의 사롱을 입고 공개적인 장소에 나타난다든가, ‘잉글랜드팀의 주장이 매니큐어를 했다, 안했다’는 논란으로 온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물론 그는 9월이면 둘째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정상적인’ 남자다. 그럼에도 베컴은 “누가 날 게이로 본다면 그 사실에 행복할 뿐이다. 게이가 사회적 유행이라서가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해서도 편견을 갖지 않도록 자랐기 때문이다”(2001년 7월·잡지 ‘더 페이스’와의 인터뷰)라고 말해왔다. 4분의 1은 유대인의 피를 갖고 있는 베컴. 스스로 편견의 희생양이 될 수 있는 처지이기에 지구상의 가장 극렬한 ‘구별짓기’인 인종주의도 혐오한다.

베컴

남성성과 여성성, 성(聖)과 속(俗), 몸값 수백억원대의 프로축구 선수와 혁명지도자상의 뒤엉킴. 정작 흥미로운 것은 한 육체가 빚어내는 이런 이미지의 결합을 지켜보는 관객들이 ‘이질적이다’‘혼란스럽다’고 여기지 않고 ‘매력적이다’‘아름답다’고 열광한다는 사실이다.

*멀티플 아이덴터티, 포스트모던 보디

2000년 베컴의 자서전 ‘나의 세계’가 나오자 영국의 좌파 문학이론가 테리 이글턴은 화보집 수준의 책에서 ‘존재의 균열’을 읽어냈다. 가디언지(紙) 서평에서 이글턴은 “베컴은 수줍음 많은 소년인 동시에 24시간 카메라를 침대 발치에 설치해두고 자신의 벗은 몸을 찍는 관능적인 나르시시스트다. 베컴이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는 순간 이 매끈한 육체는 한 노동자 계급 소년의 것이 되고 만다”고 짚어냈다. 그러나 이글턴은 이런 부조화에 경의를 표했다. “그에게서는 이 모순들이 해결될 필요가 없다. 턱과 뺨이 자연스레 맞붙어 있듯이 이 포스트모던 보디에서는 균열이 아름답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명지대)는 베컴류의 이질적인 이미지가 섞인 스타들에게 대중이 열광하는 이유를 “모든 정상적인 성인은 하나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현대심리학의 신화가 깨져가는 징후”라고 풀이했다.

포스트모던 몸담론자인 김정희 교수(가톨릭대)는 더 나아가 월드컵은 스타를 바라보는 사람들 스스로 다른 자아로 자리바꿈을 해보는 카니발이었다고 본다. “남이나 이질적 문화를 적대시하지 않으려면 그와 내가 다르지만 어떤 부분은 공유한다는 최소한의 동질성을 확인해야 한다. 월드컵은 나이 성 계층 국적까지 다른 사람들이 거리에서, 스타디움에서 어울린 카니발이다. 이를 통해 차이를 포용하는 유연성이 폭발적으로 커지지 않았을까?”

카니발에서는 가면 덕분에 다른 내가 될 수 있다. 누구나 카니발이 끝나면 가면을 벗는다. 그러나 어제 가면을 쓰고 함께 춤추며 노래했던 그 사람들이 오늘 이 거리를 걷는 저 무심한 얼굴들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더 이상 그들은 배척해야할 낯선 존재가 아니다.

모순된 요소들이 섞였으되 그 공존이 아름다운 포스트모던 보디(postmodern body). 그 영웅은 안정환도 베컴만도 아니다.

붉은색 티셔츠에 얼굴 페인팅을 한 채 밤새워 “오 필승 코리아”를 외쳤던 광화문 네거리를, 오늘은 ‘이곳에서 나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시치미 뗀 얼굴로 단정히 걸어가는 당신들. 여러 얼굴을 가지고도 행복하게 다른 얼굴들로 바꾸어가며 살아가는 당신이 그 포스트모던 보디다.

정은령 기자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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