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정희/국회의장 자유튜표를

  • 입력 2002년 5월 30일 18시 37분


오늘 역사적인 2002 월드컵이 우리 땅에서 시작된다. 수십억 세계인의 시선이 앞으로 한달 간 우리나라에 머물게 될 것이다. 요즈음 시민들이 웃으면서 여유있게 나눌 수 있는 대화 소재로는 단연 월드컵이 1순위다. 최근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의 선전과 눈부신 경기력 향상으로 16강의 벽을 넘어 8강으로의 진입도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외환위기를 이겨낸 우리의 자신만만한 모습을 월드컵을 통해 전 세계인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다.

▼정치싸움에 민생 낮잠▼

그러나 세계인들의 시선이 혹시나 우리 정치권에 쏠리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당리당략과 기득권에 얽매여 구태의 정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정치권의 모습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월드컵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조바심이 난다. 16대 국회 후반기 원 구성 법정시한인 25일을 넘기고, 30일 후반기 임기 개시일도 맞추지 못해 국회의장단과 상임위원장이 없는 ‘식물국회’가 되어버렸다. 국회가 작동을 멈춘 가운데 6·13 4대 지방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정치권이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정쟁 중단을 선언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정쟁 중단이 정치 방학이나 정치 공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치권은 월드컵을 빌미로 한숨 돌려놓고 보자는 정략적 계산으로 국회를 뇌사상태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정치는 하루도 멈출 수 없다. 오히려 정치권은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정치 행태를 보임으로써 국민을 안심시켜야 한다. 월드컵의 열기로 국민의 관심이 모두 축구장으로 쏟아진다 할지라도 국회와 정치권은 제 할 일을 제대로 해야만 한다.

원 구성을 둘러싼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정치 싸움을 보노라면 월드컵 예선 탈락 감이다. 한나라당은 원내 제1당으로서 국회의 운영을 자신들이 주도해야 한다는 ‘다수당 중심’ 논리를, 민주당은 김대중 정부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여당적 지위를 고수해야겠다는 ‘정책여당’의 논리를 내세우고 있으나 양자 모두 설득력이 없다. 2월 여야 합의로 개정된 국회법에 의하면 국회의장은 초당적인 국회 운영을 위해 소속 당을 떠나게 되어 있다. 따라서 국회의장은 3권 분립의 정신에 따라 국회를 대표하고 공정하게 운영할 덕망있는 의원을 선출하면 족하다.

제왕적 대통령과 제왕적 당 총재를 통렬하게 비판해 왔던 여야 국회의원들은 지금이야말로 국회의 독립성을 높이고 정치를 원내로 끌어들일 호기를 맞았다. 그 동안 관례적으로 실시되었던 당 후보를 위한 당론투표를 끝내고 국회법에 규정된 대로 의원들이 정당과 소속을 넘어서 불특정 후보를 상대로 소신있게 투표할 수 있는 자유투표제를 실시해야 한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초재선 의원들이 자유투표제 실시에 적극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국회의 원 구성을 지방선거 이후로 넘겨 장기 공전시키려는 의도는 축구경기에 빗대어 보면 퇴장 감이다. 지방선거 결과에 따라 정치 지평의 변화와 정계 개편을 예상하고 그 이후로 원을 구성하겠다는 발상은 국회를 국민의 대표기관으로 생각하지 않고 한낱 정당과 국회의원들의 세력 다툼 장으로 여기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민생법안이 정치 싸움의 볼모로 잡혀 있는지 국회의원들은 알고 있는가.

현재 법사위에 계류 중인 법안만 해도 19개이며 정부가 올해 안에 처리되길 희망하는 법안은 140여개에 이른다. 예금보험기금채권 차환발행 동의안, 사채업자의 고금리 횡포를 막기 위한 대금업법, 주택건설촉진법 등 민생 관련 법안들이 산적해 있다. 예금보험기금채권 차환발행 동의안 처리가 지연되면 우리나라의 대외 신인도가 하향 조정될 우려도 있다. 부동산투기 현상으로 실수요자들의 고통을 해결해줄 주택건설촉진법 개정안도 시급한 법안이다.

▼院구성 조속히 마무리▼

월드컵은 국민 모두가 힘을 모아 성공적으로 치러내야 할 지구촌의 축제다. 그러나 월드컵 분위기에 들떠 우리 사회의 제반 기능이 소홀히 작동된다면 이는 국가적 손해다. 국회부터 우선 제 기능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국회의원들도 합숙시켜 강훈련을 받도록 해 우리나라 축구 수준이 향상된 만큼 정치의 수준도 향상시킬 수 있으면 좋겠다는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조속히 국회 후반기 원 구성을 마무리해 산적한 민생법안을 처리해야 한다. 들뜬 월드컵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차분히 법안을 심의하는 국회의원들의 모습이 보고 싶다.

이정희 한국외국어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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